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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충북 옥천 청산의 동학농민혁명, 전국화 완성의 첫 걸음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2024.07.08(월) 06:17:37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uytn24@hanmail.net
               	uytn24@hanmail.net)

옥천 청산 동학농민혁명공원.
옥천 청산 동학농민혁명공원. 

동학농민혁명이 전국화된 장소가 바로 충북 옥천의 청산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던 때 동학의 최고 지도자 해월 최시형은 1년 이상을 옥천의 청산에 있었다.

충북 옥천은 내륙 깊숙한 지역으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중간지역으로 비교적 험준한 지역이다. 경북 상주와 대전, 충북 보은과 영동, 충남 금산을 통해 전라도 지방과 연결되는 길목과도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충북 영동 황간에 속해 있었던 청산의 문바위골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갑오년 9월 18일 재기포령을 내렸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해월 최시형이 총기포할 것을 명령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청산총기포령’이다.

1892년 10월과 11월의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난 다음 영동 황간 출신의 조재벽은 상당한 세력을 가진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다. 1893년 1월 광화문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고, 7월에는 최시형이 상주 왕실촌에서 옥천의 청산 문바위골로 이거할 때 앞장서 주선했던 인물이다. 최시형은 최종 결정권자이며 최고지도자로 옥천 청산은 그대로 동학의 본부였다. 최시형은 3월에 옥천에 머물면서 보은취회를 지휘했다.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 3만여 명이 모여 교조신원운동과 반외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최시형은 옥천의 청산과 보은 장내리를 오가며 보은취회를 직접 지휘했다. 보은취회는 관의 기록인 ‘취어’에 ‘충청도 15개군, 전라도 12개군, 경기도 10개군, 강원도 1개군이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옥천 청산 한곡리 문바위마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옥천 청산 한곡리 문바위마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청산 총기포령, 동학농민혁명 전국화
충북 옥천은 동학농민혁명과 매우 밀접한 지역이다. 소위 2차 기포로 알려진 옥천의 청산에서 실시된 총기포령은 한순간에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시켰다.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이 하늘같이 대접받는 사회를 향한 후천개벽의 혁명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옥천지역의 동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최초의 혁명거사일과 장소, 해월 최시형의 동학농민혁명 관여도, 동학농민군의 지휘권 문제 등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된 일자와 장소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옥천지역에 동학의 전파는 조재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재벽포는 충청도 남쪽 일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는 해월 최시형의 청산 문바위골을 소개해줄 정도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옥천지역의 동학도를 이끌고 금산의 혁명에 참여하는 등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동학접주였다. 청산에 머물던 해월 최시형은 전주화약 이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에 나서는 일본에 대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총기포할 것을 명령했다. 1894년 9월 18일 옥천 청산기포는 첫째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이며, 둘째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이상사회를 향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된 혁명성이며, 셋째 동학의 일원화된 지휘체계의 확인이었고, 마지막으로 전국 동학도들의 통합성이다. 
 

충북옥천청산의동학농민혁명전국화완성의첫걸음 1
옥천 청산 한곡리 문바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화된 시점은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을 내린 9월 18일이다. 이날을 계기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민초들이 동시에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이념으로 똑같은 지휘 체계 하에서 일사분란하게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라는 구호를 주장한다면 그 첫 단추인 전국화가 실현된 일자와 장소가 명확히 규정돼야 할 것이다. 충청도 옥천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지역이다. 산과 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주민들 역시 무거운 입을 가졌기에 비밀리에 추진됐던 보은취회나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옥천에서 1년여 이상을 거주한 해월 최시형은 단 한 번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고, 또 서둘러 보따리를 메고 달아날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옥천은 해월을 보듬어 주었을 뿐 아니라 동학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의 그 첫 단추인 전국화가 실현된 정소가 바로 충북 옥천의 청산이다.

옥천 지역은 보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 중요한 곳이다. 보은은 보은집회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며, 옥천은 1893년 10월부터 1년여 동안 최시형이 기거하면서 동학농민군을 통솔한 곳이다.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은 1894년 3~4월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옥천을 포함한 충북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도로 내려가 전봉준부대에 합류했던 것으로 보이며, 4월 중순 이후 대부분 해산했다. 이 시기부터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과 호응하면서 활동했고, 최시형이 있던 옥천 청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시형은 9월 18일 옥천에서 총기포령을 내렸고, 옥천의 박석규를 비롯해 옥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접주들이 합세했다. 옥천지역 동학농민군의 첫 활동은 10월 2일로 확인된다. 10월 19일경부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곡리 문바위 동학농민혁명기념비.
한곡리 문바위 동학농민혁명기념비.

■ 문바위골, 최시형 재기포령 내린 현장
옥천 청산지역은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포덕하거나, 동학교도에게 동학의 교리를 강설했던 곳이다. 보은 장안에 있던 대도소(大都所)와 더불어 청산 문바위골은 최시형이 머물며 교단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던 중요한 곳으로 ‘작은 장안’이라 불릴 만큼 많은 동학도들이 방문하던 곳이기도 하다. 문바위골은 최시형이 9월 18일 재기포령을 내렸던 역사의 현장이며, 백범 김구도 그 시기에 이곳을 방문해 접주 임첩을 받고 재기포령을 직접 듣기도 했다. 또 1894년 말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들이 남원까지 후퇴했다가 소백산맥을 따라 장수, 무주, 영동, 황간을 거쳐 북상할 때 문바위골에서 전투를 벌인 사실도 중요하다. 특히 9월 재기포 이후에 옥천과 청산지역에서는 관군과 일본군, 민보군에 의해 많은 동학농민군이 포살됐다.

‘갑오군정실기’에서 확인되는 옥천 동학농민군의 첫 활동은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10월 2일이다. 이날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 동학농민군 수만명이 옥천의 군기고로 들어가 군기를 모두 빼앗았다’고 확인된다.

10월 11일 손병희는 호서지역의 동학농민군 4000여명을 데리고 최시형이 머물던 옥천 청산으로 향했다. 보은 장내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기 금적산(今積山)과 삼승산(三升山) 사이에 위치한 보청천(報靑川)이 흐르는 ‘원남(元南,워내미)장터’에 유진했다. 이곳은 동서로는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로 통하고, 남북으로는 충북 보은과 옥천 청산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다. 다음날은 원남을 떠나 보청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오후 늦게 옥천의 청산에 도착해 유진했다. 지도부는 보청천을 건너 남쪽 10리쯤에 있는 문바위골 임시대도소로 가서 최시형과 배알(拜謁;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윗사람을 만남)했다. 이곳은 피신에 유리했다. 13일 지도부는 동학농민군 일부만 청산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 동학농민군은 임시대도소를 중심으로 용산, 영동 등 인근 지역으로 분산했다.

최시형은 14일 청산 임시대도소 인근에서 출정 치성식을 가졌다. 손병희에게 대통령기(大統領旗)를 내리고 호서동학군 1대(甲隊)를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해 공주성(公州城)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호서동학군 1대는 청산과 영동에서 6박 7일을 보내고 19일 옥천으로 향했다. 손병희는 14일 출정 치성식 이후 청상과 영동에서 며칠 더 머물면서 병력을 보강했다. 그리고 19일 전봉준 부대가 논산에서 북상하는 때에 맞춰 영옥포(永沃包)를 앞세워 호서동학군 1대를 이끌고 옥천으로 이동했다. 그 무렵 전봉준은 관군과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면서 옥천에 있는 손병희에게 “공주진영을 공격할터이니, 북문밖(北門外)에 매복하얏다가 관군을 격파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이에 따라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는 공주에서 10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한다리 ‘한솔벌 전투’와 효포전투, 이인전투를 전개했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머물렀던 한곡리 김성원의 집.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머물렀던 한곡리 김성원의 집.
옥천 청산 한곡리 한곡저수지.
옥천 청산 한곡리 한곡저수지.
청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기념비.
청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기념비.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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