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29.jpg)
유관순 열사 생가 진입로입니다.
입구부터 마음에 우러나는 애국심(?)
평생을 공직자로 살아온 저에게는 매우 남다른 느낌입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2](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0.jpg)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3](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1.jpg)
작은 음악회가 열렸네요.
아쉽게도 기간이 지나버려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4](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2.jpg)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5](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4.jpg)
주차장이 넓어서 너무 좋아요. 무료이라 더욱 좋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6](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3.jpg)
기념관 주변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곳들도 많이 조성되어 있어서
여유롭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걸어니 너무 행복합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7](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6.jpg)
유관순 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2년 착공, 2003년 4월 1일 개관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판결문 등의 기록자료를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으며,
서대문형무호의 여옥사 8호를 재현한 전시코너에서는 8호 감방의 노래가 울려퍼지며,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를 외치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8](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7.jpg)
1960년대 매봉교회. 생가가 불탄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유관순이 5살 되던 해인 1907년,
일본에게 빌린 차관을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됩니다.
천안지역은 천안, 직산, 목천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총 3,512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합니다.
지령리 마을에서도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이라는 교회의 이름으로
82명이 의연금을 납부했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9](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38.jpg)
전시실의 후반부에는 나라사랑 아카이브가 마련되어 있어 교과서, 도서, 기념주화, 우표 등의 현대자료가
전시되어 오랜 세월동안 3.1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에게 사랑받아온 유관순 열사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기념관을 관람하며, 유관순 열사의 불꽃같은 삶 속에 녹아있는 자유와 평화를 향한
간절한 외침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1](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41.jpg)
위쪽에서 바라본 전경
유관순 열사의 기개처럼 푸르른 기상이 돋보이는 소나무.
순국자 추모각 가는 길![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5](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46.jpg)
3.1운동이 있기 전의 어느 날 밤, 유관순은 친구 이정수를 불러 강당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 곳에는 유관순이 사 온 종이와 빨강, 파랑 물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유관순과 이정수는 강당 한 구석에서 촛불을 켜고, 찬 손을 불어가며 태극기를 그렸습니다.
당시 태극기를 본 사람이 드물었기에,
태극은 밥공기를 엎어 그리고 팔괘는 정확히 알 수 없어 흉내만 냈습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36개 방마다 붙여 다음날 선생님과 학생들이 깜짝 놀랬다고 합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6](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47.jpg)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7](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48.jpg)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규칙에 따라 아침 7시에 기상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종일 수업을 듣고
8명이 쓰는 기숙사 방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유관순을 비롯한 전교생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정동교회로 향했습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8](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49.jpg)
정동교회는 손정도 목사가 청년과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며
나라와 민족, 신앙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1918년 6월까지 정동교회를 맡았으며,
이후 상해로 넘어가 이동녕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됩니다.
손정도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필주 목사는 훗날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유관순열사기념관방문기 19](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31023/IM0002009150.jpg)
유관순열사 동상 비문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유관순열사사적지 광장 내에 건립하였습니다.
조각가 이종각 작가의 작품입니다.
동상 뒷면에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는데 시는 유제한, 글씨는 인영선님이 썼다고 합니다.
○ 전문 해설사가 유관순 열사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역사문화해설 서비스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