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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목조건축물의 웅장함과 위엄을 더하는 '치미'

2021.02.01(월) 10:05:27 | 임정화 (이메일주소:dsfjkjfsjf@hanmail.net
               	dsfjkjfsjf@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도민 여러분께서는 '치미'를 아시는가.
 
먼저 이 당돌한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 생활의 가장 중요한 3가지 필수요소, 즉 의식주 중 집에 해당하는 주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민족적 정서가 가장 극적으로 담겨진 목조건축과 한옥, 기와집에 대해 설명드리기 위해서다.
 
늘 친숙하게 보고 듣고 접해 왔던 한옥이나 기와집 및 목조건축물, 사실 겉으로만 알았지 선인들의 지혜와 웅장한 내면을 투영한 건축물 속의 치미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이번에 제대로 알려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한옥과 기와집에서 반드시 볼 수 있는 치미. 그중에서도 백제의 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서는 국립부여박물관 방문을 강추한다.
  
치미란 전통 건축물의 용마루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를 뜻한다. 목조건축의 지붕을 장식하는 특수기와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치미는 동아시아 전통 건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건물의 위엄을 높이고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하며 하늘로 펼친 새의 날개깃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치미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4세기 중후반 정도에는 치미가 널리 이용되고 있었을 것을 추측되는데, 백제도 비슷한 시기에 치미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 등에는 백제의 건축 기술이 신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고 기록돼 있어 역사적으로는 치미가 일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치미가 전시된 1층 전시실
▲치미 등 각종 유물이 전시된 1층 전시실
 
관란객들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요즘 박물관은 코로나 때문에 1일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관람객, 요즘 박물관은 코로나19 때문에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
 
사비백제의 사찰 유적인 부여의 왕흥사지, 부소산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치미는 완형으로 복원되었다. 이미 오래전 발굴 과정에서 부여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에서도 대형 치미 조각이 출토되었고, 특히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산수무늬벽돌에는 치미를 장식한 건물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부소산사지 출토 치미에서는 단순할 수 있는 건물의 지붕 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갖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인의 미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치미를 모형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전시실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치미를 모형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전시실
 
치미의 구조
▲목조건축 기와집 맨위 오른쪽에 장식된 치미
 
치미의 왼쪽면
▲치미의 왼쪽면
 
치미의 오른쪽면
▲치미의 오른쪽면
 
치미의 뒷모습
▲치미의 뒷모습
 
사선에서 본 치미
▲사선에서 본 치미
 
부여군 규암면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이 치미는 백제 위덕왕이 577년 왕흥사를 세울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국내에 전해지는 최고(最古)의 것으로 확인됐다. 복원된 치미는 높이 123cm, 최대 너비 74cm로 마름모꼴 꽃장식인 연화문, 구름문, 초화문 등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그렇다면 왕흥사지 치미의 진짜 모습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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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2000년 초부터 발굴을 시작한 부여 규암면 신리에 있는 왕흥사지 발굴 당시의 절터 모습이다(제공 문화재청).

치미를 발굴할 당시의 모습(문화재청 제공).
▲치미를 발굴할 당시의 모습(제공 문화재청)

왕흥사지는 부여의 백제 사찰 중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찰이지만,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발굴된 사리기에는 창왕 정유년(577년)에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고 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법왕(600년)이 터를 닦고 무왕(634년)이 완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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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흥사지에서 발굴한 치미 조각들을 3등분해서 복원한 것이다. 그것을 지난 2014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처음 공개했다.
  
당시 치미는 이 절의 동쪽 승방터 남쪽에서 윗부분이 나오고, 북쪽에서는 아랫부분이 각각 출토됐다. 이 왕흥사지 치미는 가장 오래된 치미를 재구성했다는 것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지붕장식 변천과 전래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치미는 새의 꼬리깃 같은 깃처리 장식이 전체를 뒤덮고 있으며 세로띠 모양의 장식인 종대가 있다. 연꽃무늬 와당으로 장식을 더한 것은 백제 고유의 디자인이며 버선코처럼 아래에서 완만하게 올라가던 곡선이 끝부분에서 극적으로 치밀어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왕흥사지 치미는 시기적으로 부소산 폐사지 치미와 형태상 유사하지만 훨씬 크고 웅장하며 장식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하게 복운된 백제 왕흥사지 치미(문화재청 제공)
▲완벽하게 복원된 백제 왕흥사지 치미, 압도적인 위엄과 웅장함이 그 자태에서 드러난다(제공 문화재청)
 
백제 고유의 치미 양식을 대표하면서도 신라 황룡사지 치미에 미친 영향이 분명히 보이고 593년 건립된 일본 사천왕사 치미와도 유사하다. 역사학자들은 중국에서 전해진 치미가 백제를 거쳐 신라에 전해지고 일본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치미의 제작 방식은 가래떡 모양으로 점토 띠를 만들어 쌓아올리는 ‘태쌓기’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동일한 장인이 같은 시기에 같은 형태로 빚어 구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백제가 불교의 교리를 건축적 공간적으로 구현했던 것으로 미루어 승려의 거처인 승방의 치미가 일반인의 예배공간인 강당지의 것보다 화려한 것을 통해 승려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백제의 치미는 부여에 천도한 이후부터 많은 수량이 제작되고 유행하게 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치미를 보면서 우리 백제인들이 건축에 있어서 상당한 미적 감각과 웅장한 기개를 갖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단순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는 건축물의 지붕 처마 끝에 이같은 장식적 요소를 가미해 건물의 전체적 조화와 균형미를 이뤄내 후세에까지 알려줬으니 존경의 마음이 절로 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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