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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항일 독립 운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

충남을 빛낸 역사속의 말띠인물 <6> - 유석 조병옥 박사

2014.06.17(화) 12:00:42 | 이기현 (이메일주소:jhdksh8173ahj@hanmail.net
               	jhdksh8173ahj@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곳은 항일 독립 운동과 대한민국 건국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 조병욱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초가 였던 생가가 이후 와가로 변형된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대지 550평에 안체 15평 부속사7평 일자형 초가로원형 복원하였다. 조병옥 박사는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한국전쟁때 내무부장관, 이어3.4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960년2월15일 불의의 신병으로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족립장을 추서 했으며 그공적을 길이 선양하고 후세에 교욱의 장으로 삼고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이 내용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있는 유석 조병옥박사의 생가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충남을 빛낸 역사속의 말띠인물, 오늘은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빼놓을수 없는 조병옥 박사 이야기입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조병옥 박사라는 인물에 대해 탐구하기 전에 먼저 알고 가야 할 재미있는 사실 하나. 국회 부의장을 지낸 고 조윤형 전 의원과 ‘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한 국회 최다선 조순형 의원 두분이 모두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시랍니다.
 
그러고 보면 조병옥 박사의 가계는 대대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집안이네요.
조 박사님의 아버지 조인원 선생과 동생 조병호 역시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인물입니다. 우리 유관순 열사와 함께 천안 병천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말입니다. 그때 조인원 선생과 조병호 역시 일경에 의해 교도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합니다.

조 박사는 공주 영명학교와 서울 숭실중학교, 그리고 연세대학의 전신인 배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유학을 갈 정도라면 그 부모의 교육열과, 교육이 정말 사람을 키우는 1등공신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부모의 열린 마인드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조병옥 박사는 귀국 후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또한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한용운 선생과 함께 3년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고, 이후 도산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또다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그의 가족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그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병옥 박사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는 강력한 반공, 반탁 활동에 나섰습니다.
미 군정 하에서 미군정청 경무국장을 맡아 국내 치안을 주도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총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54년부터는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여 이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반독재투쟁에 나섰습니다.
 
조병옥 박사께서 반독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이야기는 당신의 생가를 먼저 들러 본 후 계속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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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박사의 생가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에서부터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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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문 안쪽으로 아담한 초가집 한채와 왼쪽으로는 작은 행낭채 건물이 있는데 대체로 새로 복원된 건물이어서 차즌 사람은 많지 않아도 깔끔하게 잘 정비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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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눈길을 사로잡는 “빈대 잡기 위해 초가 삼간 태울 수 없다”비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투쟁하자는 민주당원들에게 파국은 피해야 한다며 설득의 정치를 하자는 취지로 한 말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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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안내문이 있고, 마당에 심어진 작은 과일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이 주인 없는 생각를 조금은 외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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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안방과 측면 사랑방쪽에서 본 모습이며 오른쪽은 부엌입니다. 별도의 아궁이가 있으며, 부뚜막위에 작은 무쇠솥이 걸려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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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왼쪽에는 곡간(창고)과 농사도구등을 보관하는 헛간이 있고, 그 옆에 우사의 앞에는 통나무로 만든 여물통이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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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오른쪽에 있는 우물은 두레박을 내려서 우물물을 길던 곳이 복원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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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뒤뜰로 돌아가 보니 앵두나무에 빨간 앵두가 탐스럽게 익어 있었습니다. 뒷뜰에는 멀리 장독대가 보이고 볏짚으로 이은 담자락이 옛 풍경을 더해줍니다.
 
이제 다시 조병옥 박사 이야기입니다.
조병옥박사는 건국 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 불세지공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요, 정치가로서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는 신념으로 의회민주주의를 펼치려다 병세 악화로 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 하셨으니 후세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을 추서 한바, 천안군에서는 그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본받을 역사의 장으로 삼고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옛날부터 조병옥박사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그의 업적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없었으나, 생가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평생 일대기와 업적을 다시금 기려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1955년에는 민주당을 창당해 훗날 민주당내 지도자가 되어 1959년 말 4대 대통령선거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갑작스럽게 미국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놀라운 일화가 한가지 있습니다. 2013년4월20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기사 내용중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다는 말을 회고한 것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조병옥 박사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1961년) 5.16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만섭 전 의장은 케이블 채널A의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박대통령은 조 박사는 지도력이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는 말도 했다며 박 전 대통령이 조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됐거나, 야당 지도자로서 이승만 정권을 견제했다면 자신이 정치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역사란 “IF”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진정 그때 그랬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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