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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후기 실증적 인문지리학의 대표적 선구자

충남을 빛낸 역사속의 말띠 인물 2 -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2014.02.10(월) 11:01:36 | 이기현 (이메일주소:jhdksh8173ahj@hanmail.net
               	jhdksh8173ahj@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맛집 멋집’ 혹은 ‘여행 길라잡이’나 ‘OO지역 찾아가 볼만한 곳’ ‘길 따라 멋 따라’등으로 불리었을 책이 조선시대에도 나왔다면 믿기십니까?
오늘 소개해 드릴 충청남도가 낳은 역사속의 말띠 인물 두 번째 주인공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선생이 쓴 ‘택리지’가 바로 그 책입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은 무엇일까요?
문(文)을 숭상했던 나라답게 조선의 기록 문화는 경이로울 정도로 찬란하고,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책을 낳았는데 그중에 단연 베스트셀러라면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와서 쓴 기행문인 ‘열하일기’와 이중환의 ‘택리지’입니다.
특히 당시에 택리지가 나오자마자 각기 다른 제목의 필사본(요즘같은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손으로 일일이 붓글씨로 적어서 옮겨 만든 책)이 10여종이나 될 만큼 여러 계층에서 읽었다고 합니다.
특히 사대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들고 전국의 산수를 유람하는게 유행이었다 하니 택리지야말로 요즘으로 치자면 ‘전국 여행 길라잡이’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이익(李瀷)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룬 이중환 선생의 생애에 대해 먼저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중환의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휘조, 호는 청담입니다. 오늘날 선생을 칭할 때 대개 청담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선생은 1713년(숙종 39) 문과에 급제하여 김천도찰방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했습니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자 남인인 그는 4차례나 형을 받은 끝에 1726년 절도(絶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답니다.
이후 안타깝게도 죽을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중환 선생은 공주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공주와 충청도에 남긴 삶의 궤적은 크게 두곳입니다.

하나는 어릴적 그가 뛰어 놀았다는 독락정과, 또 하나는 택리지에 "어릴적 우리집이다"고 쓴 사송정입니다.

두곳 모두 공주와 현재의 세종시에 있습니다.


현재는 세종시로 편입된 과거 조치원 금강변에 있는 독락정

▲ 현재는 세종시로 편입된 과거 조치원 금강변에 있는 독락정


조선후기실증적인문지리학의대표적선구자 1


뒷쪽으로는 금강이 유유히..

▲ 뒷쪽으로는 금강이 유유히.. 금강대교가 어렴풋이 보이고.


 
먼저 독락정부터 보겠습니다.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연기군 남면 나성리의 금강다리(금남교) 아랫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렇게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독락정 바로 옆의 고려 충신 임난수 장군의 충의를 기려 지은 사당

▲ 독락정 바로 옆의 고려 충신 임난수 장군의 충의를 기려 지은 사당과 가묘


조선후기실증적인문지리학의대표적선구자 2


고려시대에 최영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고, 공조판서를 지낸 임난수(林蘭秀)장군이 충신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 곳에 16년간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둘째아들 양양도호부사 임목(임목 1371-1448)이 아버지가 머물던 그 자리에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부안임씨의 땅이 된 이후로 정자와 더불어 전서공 임난수의 가묘(사당)과 정각을 짓게 됩니다. 독락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사마광의 정자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충청북도 옥천에도 독락정이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입니다.
 

독락정

▲ 가까이서 본 독락정


현판

▲ 현판


파란 하늘과 독락정

▲ 파란 하늘과 독락정


이 독락정은 이중환 선생의 어릴적 놀이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어린시절이 어느 나이인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공주시내에서 청벽과 불티를 지나 연기군 나성리까지 놀러올 정도로 여행에 대한 기질이 남 달랐던것 같습니다.
 

멀리서 본 독락정

▲ 멀리서 본 독락정


금강 물줄기를 옆에 rLRH.

▲ 금강 물줄기를 옆에 끼고.
 

 

조선후기실증적인문지리학의대표적선구자 3


 

이곳에서 인문학의 꿈을 키운 이중환 선생

▲ 이곳에서 인문학의 꿈을 키운 이중환 선생


충남 문화재자료 264호로 지정돼 있는 독락정은 정면 3간에 측면2간으로 되어있는데 그 앞으로 유유히 금강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중환 선생은 이곳에서 산과 강을 보며 인문지리에 대한 관심과 꿈을 키웠나 봅니다.
 
 

사송정 마을 초입

▲ 사송정 마을 초입


두 번째는 공주시 월송동의 ‘사송정’입니다.
월송동에 가면 원래 사송정이 있던 자리에는 충절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송정 마을의 명탄서원

▲ 사송정 마을의 명탄서원
 

사송정 마을의 충절사

▲ 사송정 마을의 충절사


사진을 찍기 위해 제가 찾아가 마침 그곳에서 만나 뵌 마을 어르신께 사송정의 위치를 물으니 사송정이라는 정자는 따로 없고 마을 전체를 일컬어 그렇게 불러 왔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만 믿고 사송정 자리에 있는 명탄서원과 충절사만 찍어 왔지 뭡니까.
 
 

사송정(공주시 홈페이지 자료사진)

▲ 사송정(공주시 홈페이지 자료사진)


다시 집에 돌아와 자료를 뒤져 보니 실제 사송정은 1995년 공주시가 원래 위치에서 국도 40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지점에 콘크리트로 건물로 사송정을 복원하여 놓았다는군요.
아... 이런 허탈감.
어쩔수 없이 공주시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자료 사진이 석장 있었습니다.
 
복원된 사송정은 산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약 15m 정도의 계단이 설치되었고, 경사면을 절삭하고 축대를 쌓아 만들었는데 멀리 흐르는 금강을 조망할 수는 있답니다.
 
사송정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선생의 아버지인 이진휴가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는 사실과 아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사송정은 우리 집의 것이다(四松吾家)”라고 기록한 내용에 비추어 1701년(숙종 27) 이진휴가 사송정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젠 택리지로 돌아가 보죠.
택리지에서 그는 우리 삶의 주요 지표로 삼은 지리, 생리, 산수, 인심 네 가지를 지목했습니다.
첨단 정보통신시대가 아닌 당시에 이 4가지야말로 민중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것일듯 합니다.
그는 우리 국토를 두루 답사하면서 팔도의 자연과 환경, 인물을 세밀하게 정리하여 택리지에 담음으로써 250여년 전 조선의 산천을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택리지는 사민총론, 팔도총론(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복거총론(지리, 생리, 산수, 인심)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래와 함께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그리고 사대부로서의 행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관혼상제의 사례를 지키기 위해 여유 있는 생업을 가져야 하며, 살만한 곳을 마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네요.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나라 산세와 위치를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으며, 팔도의 위치와 그 역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그는 경상도는 변한과 진한의 땅이고 함경 평안 황해도는 고조선 고구려의 땅, 강원도는 예맥의 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복거총론은 이 책 전체 분량의 거의 반을 차지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18세기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주거지 선호의 기준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거를 선정하는 기준으로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들었고, 그 어느 것이 부적당하여도 살 곳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리는 풍수에서 말하는 지리의 뜻이고, 생리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유리한 위치이며, 생리에서는 비옥한 토지, 어염과 내륙의 곡물과 면화가 교역되는 위치, 그리고 해운과 하운의 요지 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인심에서는 세상 풍속이 아름다운 곳을 말해줍니다.
또한 산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인심을 순박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었답니다.
 
택리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리서이며 동국여지승람을 대표로 하는 종전의 군현별로 쓰여진 백과사전식 지지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를 총체적으로 다룬 팔도총론, 도별지지, 그리고 주제별로 다룬 인문 지리적 접근을 갖춘 새로운 지리지의 효시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파트를 짓거나 개인주택을 지어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시때때로 전국의 명산과 바다 등으로 여행도 다닙니다. 모든게 삶의 한자락이며 끊임없는 이웃들과의 소통이고 마을과 사회를 이뤄 종국에는 국가를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훈훈한 이웃들의 인심도 따지고 보면 이중환의 택리지가 말하는 복거총론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중환 선생은 우리 삶의 먼 이전부터 미래까지 제대로 보고 있었던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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