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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4대가 현충원 안장 유일한 가문 ‘영예’

충남의 종가 - 7)예산 한산이씨 한림공파 종가

2024.07.08(월) 23:19:3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수당고택.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수당고택. /한국유교문화진흥원 



4대가현충원안장유일한가문영예 1



한산이씨 한림공파 예산 정착

한산이씨는 고려시대 호장을 지낸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고려 말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여러 세대를 거듭하여 많은 분파를 형성하였는데, 이중 예산군 대술면에 자리 잡은 한림공파는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손자 이구(李久, 1586~1609)를 파시조로 하는 계파이다.

한림공파가 예산 대술면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산해가 정계에서 물러나 노후에 명산 유람을 하다 이곳에 묫자리를 정하면서부터이다. 예산으로 내려오기 이전에는 이산해를 비롯한 아들 이경전(李慶全, 1567~1644), 손자 이후·이구, 증손자 이상빈 등이 관직생활과 과거준비를 위해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였고 지방인 보령 남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산해와 그의 손자 이후·이구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대 인목대비 및 영창대군과 관계된 사건, 인조반정 등 당시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변화한다. 이로 인해 이구의 부인 전주이씨(1589~1669)는 서울 생활과 보령 남포에 있는 토지를 정리한 후 시할아버지 이산해의 묘소가 있는 예산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부인 전주이씨는 예산으로의 이거를 위해 대장간을 먼저 세운 뒤 현재의 수당고택을 건립하는 등 체계적으로 준비하여 한산이씨 한림종가를 일으켜 세운 여장부로 평가된다. 

한림공파의 파시조 이구는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03년 소과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했다. 1608년부터 1609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 전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구를 한림공(翰林公)이라 하는 것은 예문관에서 관직생활을 하였고 예문관을 한림원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항일 의병활동 헌신 지원

한산이씨 한림공파 종가는 4대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와 맞서 싸운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奎, 1855~1907)와 이충구(1874~1907) 부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한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6·25전쟁에 참전한 이장원(李章遠, 1928~1951)은 국가유공자로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남규·이충구 부자는 한말 항일운동가이다. 이남규는 궁내부특진관(청와대 비서실장급)에 해당하는 대한제국 고위관료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다. 1893~1895년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난하고 상소를 통해 일제에 대응하자고 주장하였다. 뒤따라 단발령에 반대하여 예산으로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아들 이충구와 함께 홍주의병장 민종식의 활동에 아낌없는 후원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압송되었다. 당시 일본군이 이남규에게 일제에 복종하라고 하였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부자가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1920년대 대표적 항일단체인 신간회 선전부 총무간사, 조선일보 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선대의 영향을 받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참여, 김상옥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후원, 신간회 참여 외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조선일보 이사 재직 당시 언론 창달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힘썼다. 

이장원은 해병 중위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황토도 전투 중 전사하였다. 이장원을 비롯한 대원들은 적은 인원이었음에도 적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이에 1952년 중위로 1계급 특진하였으며 다음해 충무무공훈장에 추서되었다.


한산이씨 한림공파 종가 제사 모습.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한산이씨 한림공파 종가 제사 모습. /한국유교문화진흥원



한림공파 종가의 제례

한산이씨 한림공파 종가에서는 매년 이산해의 기제사인 불천위 제사와 음력 3월·10월에 묘소에서 지내는 시제, 파조 이구의 기제사를 지내고 있다. 

본래 이산해의 불천위 제사는 아계공파 종손의 주도로 진행되어야 하나, 사정상 현재 아계종회와 한림공파 종손 중심으로 지낸다. 종가에서는 이 불천위 제사를 ‘큰제사’ 혹은 ‘할아버님 제사’라고 부르며, 이산해의 묘소가 있는 대술면 방산리의 영당에서 기일인 음력 8월 23일 오전 11시에 진행한다. 기존 제사 시간은 밤 11시였으나, 먼 곳에서 오는 후손들을 고려하여 오전 11시로 변경하였다. 

또한, 파조 이구의 기제사도 종가 자체적으로 매년 지내고 있다. 이구는 불천위 인물이 아니지만 그야말로 한림공파 종가의 파조이기 때문에 매년 11월 2째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소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종손 이문원씨가 고택을 소개하고 있다.

▲ 종손 이문원씨가 고택을 소개하고 있다.



여장부가 지어올린 수당고택

예산군 대술면에 위치한 수당고택은 한산이씨 한림공파의 종택이다.  파조 이구의 부인 전주이씨가 1637년에 건축하였다. 종손 이문원씨에 의하면 왕실 사람인 할머님(전주이씨)이 지었기 때문에 이 집은 당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건축형태와는 다른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른 고택과 달리 안채가 앞에 나와 있고, 사랑채가 뒤로 물러나 있어 안채문이 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점과 대문의 위아래가 둥근형태(월방문)로 조성된 점, 대문과 중문의 잠금장치에 천원지방 사상이 반영된 점 등은 어려서 궁궐을 많이 출입하였던 전주이씨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고택은 1846년, 1978년에 중수된 이후의 모습으로  조선 중기 양반 가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고택이자 종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으로서 2014년 국가민속유산 ‘수당고택’으로 지정되었고 ‘이남규 고택’으로도 불린다. 수당고택은 항상 개방되어 있어 관람 가능하며, 고택스테이를 체험하고 싶다면 수당기념관 홈페이지(http://www.sudang.net) 및 예약(041-331-4401)을 통해 가능하다.


수당기념관 문화 프로그램

수당기념관은 예산군, (사)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와 연계하여 수당 이남규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20~2021년에는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공모사업 ‘고택·종갓집 활용사업’에 수당고택이 선정되어 고택 그리기·한시 읊기·서각체험·인문학 프로그램 등 여러 가지 콘텐츠를 진행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현재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는 매년 가을에 개최하는 수당고택음악회가 있으며, 다가오는 올해의 음악회도 기대된다.  
/서흥석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유교문화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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