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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두계장터 만세 운동과 독립운동가의 흔적

잊혀져 가는 만세운동 함성과 독립 운동가의 초라한 생가지(生家址)

2023.02.28(화) 07:40:35 | 라미스리 (이메일주소:sms1108 @hanmail.net
               	sms1108 @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계룡역을 지나 대전으로 향하다보면 <4.1 독립만세 운동 발상지>인 <두계장터>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장터였는데 현재는 단지 서너개의 식당과 오래된 전파사, 정미소 만이 장터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장터 버스 승강장 옆에는 이곳이 1919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표지판이 초라하게 장터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곳이 '4.1 독립만세운동 발상지'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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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독립만세 운동 발상지 안내 표지판

3.1 운동이 발생한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발하는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해 4월 1일, 계룡지역에서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두계장터>에서 배영직 열사의 주도아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당시로는 비교적 많은 1.000여명이 참여했으며 그중 일부는 일제 수탈의 상징인 호남철도 선로 파괴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배영직 열사는 옥고를 치르고 모진 고문 휴유증으로 출감 후 3일 만에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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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두계장터. 멀리 아파트가 내려다보고 있다.

두계장터는 팥거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성계가 천도를 계획할 당시, 궁궐을 짓는 인부들에게 이 지역 특산물인 팥으로 만든 팥죽을 제공했다는 설(說)과 연관있는 옛이름이다.  팥죽 맛을 즐기려는 애호가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다.  10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은 점차 사라지고 독립운동의 희생도 잊혀져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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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에서 바라본 장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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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으로 유명한 '미더유' 인증식당. '콩쥐팥쥐'  

두계장터에서 대전방향으로 약 200여 미터 걸어가면 또 하나의 표지판과 만날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치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잡초를 배경으로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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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양기하 장군 생가지(生家址) 표지판

바로 < 독립운동가 양기하(1878~1932)장군 생가지>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장군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광복군 사령부 교육위원장, 임시정부의 참의부 교육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항일 무장운동을 지휘하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희생했음에도 생가지가 초라하게 방치된 채 잊혀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 온다.

이제 발길을 돌려 두계장터 아랫마을로 향한다. 아랫마을은 철길이 가로 지르고 있기에 터널을 지나야한다.  터널엔 이곳이 예로부터 팥 주산지며 팥 음식으로 유명한 팥거리임을 알리는 벽화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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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마을로 향하는 철길 아래 터널과 벽화.

터널을 나서자 두계천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마을이 나타난다.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었으나 이제는 오래된 이발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마을 입구에서 표지판을 만난다. 철길을 배경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독립운동가 김지수(1845~1911) 선생 생가지> 표지판이다. 철로로 인해 이곳이 생가지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겠는데 표지판만이 생가지 임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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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김지수 선생 생가지(生家址) 표지판

독립운동가 김지수 선생은 김장생 선생의 11대 손으로 1900년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가 일제의 간섭을 보고 사퇴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회유책을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1911년에 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과거 면 단위의 좁은 지역이지만 비교적 많은 만세운동의 유적과 독립 운동가 생가지(生家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계룡지역이 국가 수호의 국방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세운동 정신과 독립에 대한 헌신,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오늘날에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세 운동 발상지에서 배영직 열사를 추모하며 양기하 장군, 김지수 선생. 두 분 독립운동가의 생가지(生家址)를 둘러본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이 훈장 추서 등 나름대로 진행되고는 있으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분들의 업적과 뜻을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호국정신 계승을 위한 시설 확장이 필요함을 느끼며 봄날의 짧은 산책을 마친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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