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정록 시인의 서랍
2022.06.07(화) 13:35:02 | 도정신문
(
scottju@korea.kr)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고
머리맡에 써놓았다.
천권을 읽어야
시 한편 온다.
편지봉투에 풀칠하듯
한줄 더 봉한다.
천편을 써야
겨우 가락 하나 얻는다.
이율배반(二律背反),
이천편을 쓰면
등 뒤에 눈을 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것들의 목록』 창비
등단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책도 서른 권이 나왔다. 책이 나올 때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빠뜨리고, 이만저만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다. 비용과 노동도 문제지만, 그동안 만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내 책을 부닥뜨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근무처 재활용창고 박스 더미 속에 끼어 있었는데 언뜻 눈에 익은 글씨가 보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속지를 살짝 뜯어냈다. 잘못하면 내 책 한 권을 얻은 대가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엇박자로 쿵쾅거렸고 기분이 며칠 편하지 않았다.
지난겨울엔 집 앞에 있는 장애인 복지회관에서 나의 시우화집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란 책을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속표지에 내 서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른 덮어야 마땅한데 어쩌다 보니 다 보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누나와 매형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매형은 장애인후원회 일을 도와주고 있다. 아마 이 책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으로 기증을 한 것이리라. 서명해서 건넨 책이 전혀 상처 없이 꽃을 피우는 것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조용히 내 이름 석 자를 어루만진 뒤 서가의 좋은 자리에 꽂아두고 나왔다.
천편일률이란 “여러 시문(詩文)의 글귀가 모두 한결같이 비슷비슷함”을 경계하는 말이다. 내 시가 죽은 시인가? 살아 펄떡이는 시인가? 알아보려면 최소한 천 편의 시를 써야 한다. 시집 한 권에 예순 편쯤 싣는다고 어림해보면 스물다섯 권을 분량을 습작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도식적인 틀을 깨부수고 자유로운 가락 하나를 얻는다. 이천 편쯤 써야만 등에도 시안(詩眼)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