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조선 선조와 광해군시대 문관으로 사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된 추포 황신을 모신 창강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27.JPG)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1984년 5월 17일 지정된 창강서원은 언덕에 조성되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2](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28.JPG)
창강서원은 우의정으로 추정되는 추포 황신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7년 1629년에 세워져 숙종 8년인 1682년에 사액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3](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29.JPG)
금강가 언덕에 자리잡은 창강서원의 동재와 서재는 일반적인 서원에 있는 배치하고는 다르게 홍살문 방향으로 나란히 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4](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0.JPG)
동재와 서재가 있는 공간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추포 황신 선생을 모신 제사공간인 사우가 금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자리잡고 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5](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1.JPG)
창강서원 서재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모셔졌던 황신의 묘소를 1964년 이장하여 다시 쓴 묘소가 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6](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2.JPG)
추포 황신 선생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종갓집(충남 부여군 부여읍 용정리 390번지)을 찾아가니 유물을 국립 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7](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3.JPG)
황신 선생 종갓집 장손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서재에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문민공 추포 황신 선생 행적기를 찾아다 주셨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8](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4.JPG)
조선왕조실록에 535건의 행적과 승정원일기에 6건, 일성록에 2건의 추포 황신 선생의 행적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겨 있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9](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5.JPG)
추포 황신은 고려 문화시랑 희산부원군 황석기의 후손으로 1562년 정랑 황대수와 청주 곽 씨의 아들로 조선의 수도 한성에서 태어났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0](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6.JPG)
1583년 선조 16년, 우계 성혼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황신이 지은 설죽 시를 평하기를 “시안에 깊은 뜻이 있으니 가히 조달하리라”라는 인정을 받았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1](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7.JPG)
1596년 선조 29년, 절충장군에 임명되어 왜영에서 적의 준동을 막은 후 통신사에 임명되어 309인을 인솔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이 재침략 할 것을 예견하여 명나라에 내원을 청하게 하였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2](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8.JPG)
1609년 선조 42년, 1월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2월에 공조판서에 오르고, 9월에 호조판서에 오르고, 12월에 정 2품 상 정헌대부에 올랐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3](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39.JPG)
광해 5년인 1613년에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협의 무고로 황해도 옹진으로 유배되어 광해 8년(1617년) 58세의 나이로 유배지 옹진에서 작고하였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4](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40.JPG)
인조 1년(1623년)에 무고죄를 벗고 정 1품 우의정에 추증되고 인조 7년 1629년에 문민공의 시호를 받고 창강서원을 세워 황신의 인품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조선인조때우의정에추증된추포황신을모신부여창강서원 15](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10601/IM0001721541.JPG)
창강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7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삼충로서원북길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