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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경술국치에 다시 뵙는 윤봉길 의사와 배용순 여사

2020.09.12(토) 13:39:00 | 이기현 (이메일주소:jhdksh8173ahj@hanmail.net
               	jhdksh8173ahj@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2주 전이었던 8월 29일, 이 날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뜻으로 일제에게 우리나라가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사실을 말한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신협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준비해 갔다.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병 조약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여, 결국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이 건국 519년 만에 끝이 나고 이후 35년간 일제 식민지의 세월이 시작된 날이다.
  
오늘 포스팅하고자 하는 글은 그 경술국치일을 맞아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많은 애국지사중 윤봉길 의사의 부인이셨던 배용순 여사에 대한 것이다.
 
윤봉길의사 사당이 있는
▲윤봉길 의사 사당이 있는 충의사 거리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기념관
 
현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충의사는 일제강점기에 25살의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봉헌하고 있다.

다 알다시피 윤 의사는 23세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 국무령과 함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던지기로 뜻을 모았다. 거사 직후 윤 의사는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된 뒤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그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윤 의사는 이곳 예산의 시량리에서 태어나셨고 생가와 성장가가 보존되고 있다.
 
저 멀리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보인다.
▲저 멀리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보인다
 
윤 의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나온다. 윤의사의 사당 가까이에 작은 계곡이 있고, 그 너머 야트막한 산자락(기념관 바로 오른편 뒤쪽) 소나무숲에 고요히 누워 계신 묘소가 보인다.
 
생전의 배여사 모습
▲생전의 배 여사
 
배 여사는 동학민의 자녀로 태어나셨고, 16살이 되던 1922년에 한 살 연하인 윤 의사와 결혼했다. 23살에 윤의사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실 때 남편이 목마르다며 부엌에서 일하던 배 여사에게 물 한 그릇 달란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윤 의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뜻을 품고 집을 떠날 때는 아들이 둘 있었고, 또한 셋째를 임신중이었다.
 
충의사에서 바라본 태극기
▲충의사에서 바라본 태극기 물결
 
욘봉길 의사 영정
▲윤봉길 의사 영정
 
거사 전 김구 선갱과 함께...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후 거사 전 김구 선생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도시락 폭탄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도시락 폭탄
 
각종 신문에 보도된 윤의사의 거사 소식
▲각종 신문에 보도된 윤 의사의 거사 소식
 
윤 의사는 집을 나서기 전 "사나이는 집을 떠나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마지막 유서를 배 여사에게 남겼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적어본다.
 
1978년에 '뿌리깊은 나무'에서 발간한 "털어놓고 하는 말"이라는 책이 있다. 이 안에 배용순 여사가 당시의 상황을 직접 구술한 내용이 나오는데, 윤 의사 거사 직후 배 여사가 겪은 고통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조금만 소개하면 이렇다.
  
“그해 스물 아흐레날이다. 우리 집에는 수 많은 일본 경찰과 신문기자들이 몰려왔다. …(중략)… 나는 아이들을 챙겨서 방에 들어앉히고 이를 악물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아 먹자고 스스로 타일렀다. 정말이지 눈물한 방울 흘릴 겨를이 없었다. 기자들은 사진기를 내 쪽으로 겨누고 정신없이 눌러댔고 경찰들은 옆구리에 칼을 철거덕거리며 구둣발로 방마다 들어가서 뒤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날 죽여라. 날 죽여 다오" 하고 경찰들에게 악을 썼다. …(중략)… 몇날 며칠을 끊임없이 경찰과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기진하다시피한 시부모들과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 시누이들과 내 자식들이 가엾고 가여워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대로 고꾸라져 죽어 버리고 싶도록 괴로웠다.”
  
이런 고난을 겪으면서 배 여사는 윤 의사가 일제에 의해 순국하신 1932년부터 시부모가 돌아가신 1950년대까지 충남 예산에서 20여년 간 홀로 시부모와 시동생들을 돌보며 극진히 모시고 사셨다. 그 과정에서 평생 동안 남편이 사라진 집앞 신작로에 다시 나타날까 늘 그 길을 바라보며 사셨다고 하는 배용순 여사.
  
충의사 앞에서 배용순 여사와 가족 1982년-좌로부터 동생 윤남의,손자 윤주웅, 며느리 김옥남(윤종 부인),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장손녀 윤주경). 충의사 제공
▲1982년 충의사 앞의 배용순 여사와 가족(좌로부터 동생 윤남의, 손자 윤주웅, 며느리 김옥남배용순 여사, 아들 윤종, 장손녀 윤주경), 사진 제공 충의사
 
23 윤의사의 장남 윤종과 김옥남 결혼사진 19570416-뒷줄 오른쪽부터 김신(백범의 참남), 배용순 여사, 김신 부인
▲1957년 윤 의사 장남 윤종과 김옥남 결혼사진(뒷줄 오른쪽부터 백범 차남 김신, 배용순 여사, 김신 부인), 사진 제공 충의사
 
배용순 여사의 회갑연 1967년 9월
▲1967년 9월 배용순 여사의 회갑연
 
또한 배 여사는 생전에 남편 윤 의사의 명예로운 죽음에 혹시 누가 될까 봐 늘 말을 아끼며 조용히 사셨다고 한다.

농촌 생활이 다 그렇듯, 때로 고된 가사 노동이 너무 힘에 부칠 땐 시부모의 허락을 받고 친정에 가서 며칠을 묵었다. 그렇게 2~3일이 지나면 시아버지가 배 여사의 친정을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사랑방에 앉아서 기다렸고, 배 여사는 시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이어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946년 일본에서 돌아온 남편의 유해를 확인하고서도 6·25 전쟁이 끝나고 귀향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혹시 저 무리에 남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거리를 바라볼 정도로 윤 의사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경술국치에다시뵙는윤봉길의사와배용순여사 1
 
배용순 여사 묘소
▲배용순 여사 묘소
 
그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며, 외롭고 가슴 아팠을 긴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절절한 심정은 지금 주권국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가슴에 와 닿는다. 이에 위대한 순국선열과 그 가족분들의 숭고함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의 존경을 모두 담아 예를 표하고자 한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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