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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쇄미록', 조선 선비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써내려 간 짠내 나는 일기

조선 선비 오희문이 부여에 남긴 흔적을 찾아서

2020.08.17(월) 23:11:21 | 충화댁 (이메일주소:och0290@hanmail.net
               	och029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긴 장맛비로 인한 활동의 제한이 세트로 사다놓고 읽지 못했던 책들로 눈길을 돌리게 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와 전란도로 피란을 다니는 9년여 동안 꾸준히 일상을 기록해 놓았던 조선 한 선비의 일기가 있다.
  
보물 제 1096호.쇄미록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보물 제1096호 '쇄미록',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사진 출처 우리문화신문)
 
요즘으로 치면 소소한 일상을 개인 블로그에 기록해 놓는 블로거 정도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런 소소한 기록들도 꾸준히 쓰기는 쉽지 않은데, 거의 매일 만난 사람들과 먹을거리, 왜란의 참상, 일상의 동선들까지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중에 쓰여진 조선의 3대일기이다.
  
조선의 선비 오희문(1539~1613)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았다. 왜란을 피해 지방으로 떠돌면서도 나라와 임금을 걱정했던 심정을 고스란히 일기 속에 드러낸 천상 선비였다.

그가 쓴 일기 '쇄미록'이란 제목은 시경에서 ‘패풍·모구’의 “자잘하며 자잘한 이, 떠도는 사람이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쇄미록은 제목처럼 자잘하고 소소하며 떠돌며 살았던 한 개인의 기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블로그 꾸미기에 열을 올리듯이 조선의 한 선비도 저녁마다 먹을 갈고 종이를 준비해 그날의 일상을 기록해 놓았다.
 
39쇄미록39조선선비오희문이임진왜란중에써내려간짠내나는일기 1▲조선 선비 오희문이 쓴  쇄미록 한글 번역본

조선 선비 오희문은 요즘 같으면 파워 블로거이자 먹방 유투버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생존형 먹방 유튜버라고 하겠다. 그런 오희문에게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다 남이 먹는 모습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오늘의 세태는 참으로 개탄스러운 노릇일 것이다. 
 
체면 불구하고 가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식량을 구하러 다니며 빌려온 곡식의 무게와 수량까지 정확하게 적어가며 짠내 나게 처절한 생존의 한가운데 던져진 조선의 선비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알까?
 
성흥산에서 바라 본 부여군 임천면 전경, 조선의 선비 오희문 일가가 왜란을 피해 이 곳 어딘가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성흥산에서 바라 본 부여군 임천면 전경, 조선 선비 오희문 일가가 왜란을 피해 이곳 어딘가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한글 번역본으로도 8권의 책으로 발행된 쇄미록은 한문 필사본 7권 800여 장 분량의 기록이다. 한글 번역본 8권 중 3·4권이 오희문이 왜란을 피해 부여에 내려와 살았던 기록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 부여의 조선 중기의 모습이 궁금해서 3권부터 집어 들었다. 
   
오늘의 부여는 일제강점기에 행정 중심지를 임천에서 부여읍으로 옮기면서 ‘부여’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부여와 임천이 각각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선비 오희문의 쇄미록에도 부여보다는 임천이라는 행정구역 이름이 많이 쓰였다. 그와 가솔들이 머물렀던 곳도 임천이었다. 일상의 기록이다 보니 매일 찾아왔던 손님들의 이름과 방문 목적, 그가 찾아갔던 관청과 만났던 관리들의 이름, 대접받았던 음식들과 가져왔던 곡식들의 수량까지 좀스러울 정도로 세세하게 써놓기도 했다.
 
조선 선비의 짠내 나는 일상의 기록들을 들여다보다가 의미 있는 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천신(薦新)’도 못했다는 단어였다.

“세상에 이런 장마가 어디 있대유. 올해는 텃밭에 그 흔한 오이와 호박을 천신도 못했당게유.”

요즘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천신’이라는 표현을 무엇인가가 흔치 않아서 구하기 어렵다는 표현을 할 때 썼다. 전란의 한가운데에서 낯선 곳으로 피난을 와서 살았던 조선의 선비에게 최저 생계를 위한 먹거리조차 구하기 힘든 날들이었다. 하물며 조상의 신위에 햇곡식이나 과일 등을 먼저 올리고 먹었던 ‘천신’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신주단지에 모셔둔 다음해 파종 씨앗들마저 꺼내먹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오늘을 사는 부여 사람들의 언어 속에서 쇄미록의 용어 ‘천신’의 흔적을 이렇게 발견했다.
 
쇄미록을 통해서 현재도 남아 있는 지명이나 건물을 흔적을 따라가면 지금은 문화재가 된 사찰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역사는 늘 백제의 유물들에 가려져 있어서 조선의 역사는 한 발 물러서 있는 경향이 있다. 백제의 역사는 유물의 역사이지만 부여의 조선의 역사는 기록과 흔적의 역사이다. 그 자취를 찾아가면 생활과 언어, 문화재 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조상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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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 오희문이 놀러갔던 임천 보광사지는 현재 가람은 없어지고 쓸쓸한 잔해만 남아 있다 
 
쇄미록에는 임천에 있는 사찰의 이름들이 언급되었다. 임천의 대조사와 보광사는 오희문이 선비들과 함께 밥을 해먹고 놀기도 하며 승려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당시는 왜란 중이라 사찰의 승려들도 승병이 되어서 출타했다고 기록돼 있기도 하다. 지금은 외산면으로 행정구역이 정비된 무량사도 언급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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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임천면 성흥산 대조사
 
어릴 적부터 데리고 있던 노비가 승려가 되어 무량사에 머물게 되었다. 노비는 전란 중에 승려가 되었지만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어서 오희문을 찾아왔다고 했다. 오희문은 그 승려가 된 노비의 처지가 불쌍했지만 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그로서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는 노비와 한집에 살면서 그 노동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쇄미록에는 노비에 관한 기록들이 많다. 노비의 성품에 대해 적어 놓기도 했고 도망간 노비를 잡게 되면 벌을 주겠다고도 했다. ‘추노’라는 TV 드라마에서는 도망간 노비를 찾아다 주고 삯을 받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렸지만 쇄미록에는 도망간 노비에 대해 얄밉다고 적었을 뿐 추노꾼에게 의뢰했다는 내용은 없었다.
 
임천 향교. 조선의 선비 오희문은 임천 향교에 자주 들렀다.
▲임천향교, 조선 선비 오희문은 임천향교에 자주 들렀다
 
쇄미록을 읽어 보니 노비는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오희문 일가에게도 집에서 부리던 노비가 도망가거나 병들어 죽는 바람에 품팔이 일꾼들을 사서 논에 김을 매거나 벼수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기초수급자처럼 관청에서 곡식을 얻어다 먹고 사는 처지에 일꾼들의 품삯과 식대로 쌀 몇 말이 소비되고 나면 그만큼 식구들의 양식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였다.
 
지금은 웅포 대교가 놓여졌지만 조선의 선비 오희문은 웅포 나무에서는 고기 잡이를 구경했고 지금은 임천면 칠산리 인근의 남당진 나루에서 함열 현감에게 시집간 큰 딸네를 자주 오갔다.
▲금강하구둑의 웅포대교

지금은 웅포대교가 놓여졌지만 조선 선비 오희문은 웅포 나무에서는 고기잡이를 구경했고 지금은 임천면 칠산리 인근의 남당진 나루에서 함열현감에게 시집간 큰 딸네를 자주 오갔다.
 
쇄미록은 말 그대로 잡다하고 소소한 개인의 일기이지만 왜란 중에만 썼다. 그 속에는 조선 중기의 생활상과 개인의 일상사, 관청의 기록들, 먹거리 등 수많은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이런 과거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바탕이 됐다.
 
오희문이 살았던 부여 땅에서 살고 있는 나는 타임 슬립을 하듯 그가 말을 타거나 걸어서 다녔던 곳을 찾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임천에 사는 선비들이 임천에 피란을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했던 날에 임천 사람들이 인심이 후하다고 기록했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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