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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500년 한자리 오롯이 충청을 지켜준 명종태실

선조의 숨결에서 느끼는 '국태민안'... "코로나 완전극복 이뤄주세요"

2020.05.02(토) 10:23:41 | 유병화 (이메일주소:dbqudghk30@hanmail.net
               	dbqudghk3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서산에 가면 국가 보물 1976호로 지정된 명종 태실(胎室)이 있다. 이것이 원래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으나 보존 상태가 워낙 좋고 역사적 가치가 높아 2018년에 국가 보물로 격이 높아진 것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해왔다. 민가에서 그 정도였으니 왕손이야 오죽했겠는가. 태를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달랐는데, 그중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왕가의 태실은 태봉(胎封)이라고도 불렀다. 왕자가 출생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길지를 택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지방은 관찰사가 왕·왕비·왕세자의 태실과 종묘 각실, 왕후 부모의 묘소까지 모두 살피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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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명종 태실은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1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국도 32호선을 따라 해미 방향으로 약 5㎞ 정도 가면, 도로 좌측으로 문수사로 들어가는 태봉리 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명조대왕 태실은 도로에서 약 1㎞ 정도 들어간 해발 약 130m의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의 태실이 다 그렇듯 평지에 있지 않고 대체로 구릉이 있는 산자락 속에 묻혀 있어서 태실을 보려면 약간의 발품 노력을 해야만 한다. 산이 높지는 않지만 경사도는 매우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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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대왕 태실에 대한 설명을 해 놓은 산1번지 산자락 아래 출발지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태봉리 일대는 명종의 태실로 선택될 정도로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태봉리(胎封里)라는 마을의 지명도 명종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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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도가 넘어 보이는 매우 가파른 경사의 산자락을 올라서면 이제 좀 한숨을 돌릴수 있는 낮은 경사도의 이동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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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다 왔다. 태실을 만나기 70m 전, 저기 보이는 계단만 오르면 태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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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태실에 관해 공부할수 있는 안내문이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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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대왕 태실은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1534~1567)의 태를 모셨던 곳이다. 1538년(중종 33)에 건립되었다는 내용의 건립기가 적혀 있다. 여기서 명종의 업적을 약간 살펴보면 이렇다.
 
중종의 둘째 아들이면서 인종의 아우로 태어난 명종은 임시기구였던 비변사를 상설화시켜 국방 문제를 전담하게 하고, 바다와 육지의 군사를 관찰사의 지휘 아래 두어 공동으로 전쟁에 임하게 하는 등 국방 대책을 마련했다. 수차를 만들고 전함을 건조해 외침에 대비했고, 성종대부터 명종 초까지 내우외환을 진압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속무정보감’과 경국대전의 어려운 용어를 풀이한 ‘경국대전주해’를 간행했다. 흉년으로 응급 구제기관인 동·서진제장을 열어 구휼하고 상평창을 열어 빈민을 구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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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건립기를 쓱 훑어보고 난 후 발걸음을 재촉하니 저기 태실이 보인다. 500년간 한자리에서 오롯이 서산을 내려다 보면서 백성과 나라를 굽어 보살펴 온 명종대왕의 혼이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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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난 명종대왕 태실. 32개의 부채꼴 판석을 깔아 8각 지대(地臺)를 만들어 8각의 돌난간을 세우고, 그 중앙에 석종형(石鐘形) 태실과 8각 옥개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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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의 항공사진이다.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니 태실의 전후좌우를 쉽게 파악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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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의 총면적은 132.23㎡(약 40평)이다.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인 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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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부도형의 태실탑이다. 사각의 기단석 위에 상하가 약간 긴 구형의 돌을 올리고 팔각의 옥개석을 덮었다. 부도는 대개 사찰에서 스님이 입적한 뒤 거기서 나오는 사리를 수습해 보관했던 석물(石物)이지만 태실에도 부도형 태실탑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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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실의 서북쪽으로 3개의 태실비가 서 있다.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椿齡阿只氏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는 남쪽의 비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1538년(중종 33)에 태실을 만들면서 세운 것이다. ‘왕자전하태실(王子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는 북쪽의 비는 인종(仁宗)의 승하로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심해야 하기 때문에 1546년(명종 1)에 세운 것이다. 중앙의 비는 1711년(숙종 37)에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왕자전하태실비’를 개각하여 세운 것이다.
 
3개의 비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비신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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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대좌가 위엄있게 앉아 태실을 지키고 있다.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조선 왕실의 많은 태실이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변형된 경우가 상당한 데 비하여 명종대왕 태실은 조선왕조실록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져 있다. 그리고 원래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서 주변 지형 등 환경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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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태실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저 멀리 운산면 태봉리 마을이 조금 보인다.

조선시대 태실의 관리는 관할구역 관리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을 하였을 때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명종 태실도 대체로 양호하게 관리되었고, 태실의 존재를 아는 마을 사람들이 이를 잘 지키며 살아와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상당히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후 방치되었던 것을 모아 1975년에 복원했는데 비석 등 거의 모든 것들이 온전하게 있어서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이 가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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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이곳에서 혼령으로 남아 500년 동안 우리 충청도 전역을 살피고 백성의 안위를 보살폈을 것이다.

명종태실과 비는 태실, 가봉태실, 가봉개수태실의 변천 과정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고 조선 왕실의 안태의례(安胎儀禮)의 역사적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한국미술사의 태실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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