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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예산 충의사, 윤봉길 의사의 뜻을 기리며

2019.01.18(금) 09:40:32 | 쟈스민 (이메일주소:mee0102@naver.com
               	mee010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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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에는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올해 2019년은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 그 의미가 뜻깊은 곳일듯 싶다.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된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뜻과 나라사랑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 229호로 지정된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충의사)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 생가인 광현당과 성장가인 저한당, 농촌부흥운동을 하신 부흥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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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에 먼저 들렸다. 영정은 표준영정 제 16호(210cm x120cm)로 비단에 채색한 것이라 한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 의거를 치르고 순국한 것이 그의 나이 고작 25세였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이제는 나라 걱정없는 하늘에서 편안히 쉬기를 바라며 참배를 드리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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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성장부터 순국까지 그의 일대기가 담긴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곳에 전시된 그의 유품은 대부분이 실제 그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물 제 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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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다음 해에 일본인 선생에게 불만을 품고 자퇴, 13세에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매곡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매헌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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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학구열이 무척 강했던 것 같다. 그가 일상에서 쓰던 놋양푼, 사기그릇, 주발대접, 수저, 놋대야를 비롯해 동생 남의에게 가르치던 명심보감 초본,  연적, 석합, 벼루, 책상, 붓통, 궤상, 등잔대,  윤봉길 의사의 친필이 담긴 친필집자, 직접 지은 한시를 모아 묶은 한시집인 순운대편과 염락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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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신문화를 습득하고 농촌 부흥에 노력하여 <농민독본>을 편찬하여 가르치고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농민독본>은 1927년 야학용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 윤봉길 의사가 편저한 책으로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프린트하여 사용하였다. 모두 3권이었으나 1권은 유실되었고 2권과 3권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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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진회기는 바탕색인 흰색은 백의민족의 표상이고 3중의 청색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한가운데의 무궁화는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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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31년 5월 독립운동이라는 더 위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났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독립운동 조직인 상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었고 홍커우공원 의거를 비밀리에 준비했다. 의거 전 태극기 앞에서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인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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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홍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난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황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여러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 여러곳에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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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당시 지녔던 지갑과 중국화폐, 윤봉길 의사의 도장, 안경집, 순국할 때까지 사용한 손수건, 또한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으로 떠나기 전 백범 김구 선생과 맞바꾼 것으로 유명한 회중시계도 전시되어 있다. 거사에 사용하였던 수통 폭탄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자결용 폭탄은 비록 모형이지만 25세 청년에게 짊어진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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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현장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삼소정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사형 당시 묶였던 사형틀 가로목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요즈음의 25세에게 윤봉길 의사와 똑같은 나라사랑을 누구에게 강요할 수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 자주 방문하고 윤봉길 의사의 뜻을 기리며 애국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도 작은 나라사랑의 실천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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