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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항일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 유배도 전국 최초 공개

청양군, 군산의 소장자로부터 구입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상설 전시

2016.11.29(화) 14:27:07 | 내사랑 충청도 (이메일주소:dbghksrnjs6874@hanmail.net
               	dbghksrnjs687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항일애국지사최익현선생유배도전국최초공개 1

이 사진. 유리에 비쳐 카메라 렌즈에 선명하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윤곽은 정확히 알수 있는 이 사진 속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구한말 대표적인 항일 의병장이자 위정 척사파중 한명이었던 독립지사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이 대마도로 유배가던 도중, 일경의 서슬퍼런 감시아래 마지막으로 그와 마주앉아 안녕을 빌던 당시 부하 의병중 한사람의 모습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할수 없는 앞날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져 압송돼 가는 면암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절절한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망국의 설움이 어느정도인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다.
이 사진은 면암의 충절과 의기를 기리기 위해 충남 청양에 세워진 기념관인 모덕사 유품전시관에 현재 보관돼 있는 것이다.
 
느닷없이 면암과 관련된 사진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동안 면암이 대마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단식 끝에 순국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끌려가던 당시 상황을 한폭의 그림으로 남긴 사람이 있고 그것이 마침내 청양군으로 돌아와 우리 일반인들이 볼수 있도록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그림으로 인해 선생을 다시 한번 기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면암의 유배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면암의 유배도를 그린 사람은 조선 말기 화가인 채용신(1850∼1941) 선생이다. 그는 면암의 영정도 함께 그렸다.
그림을 그린 때는 1932년 면암 선생의 일성록이 발간되던 시기 또는 그 이후로 보고 있다. 이 그림에는 면암 일행이 숭례문을 나올 때부터 부산 초량역에서 대마도로 떠나는 과정까지 한 장의 비단에 절반씩 나눠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항일애국지사최익현선생유배도전국최초공개 2

면암선생의 유배도는 현재 충남 청양군 대치면에 있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전국 최초로 공개 전시되고 있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한달전 오픈한 청양의 새로운 박물관이다. 사진에서 보는 이곳은 박물관 초입 외곽 풍경이다.
 
항일애국지사최익현선생유배도전국최초공개 3

이곳은 박물관 전경. 안에는 백제문화를 알수 있는 도자기류와 당시 청양군 주변의 시대상을 알수있는 백제시대의 여러 유물, 미니어처 등이 함께 마련되어 있고 일부 체험공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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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 관람객들이 돌아보고 있다.
 
항일애국지사최익현선생유배도전국최초공개 5

자, 이곳이 면암의 영정과 유배도가 전시되어 있는 2층 전시장이다. 저기 두폭의 영정과 그 가운데에 유배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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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이 그린 면암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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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시 채용신이 그린 면암의 유배도이다.
 
이 유배도는 청양군이 박물관의 전시물 자료 수집 과정에서 면암의 제자 장모씨 손자(군산 거주)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 한다.
청양군은 이 그림을 충남도문화재위원회 등 학계 인사에게 감정을 의뢰, 1930~40년대 화가 채용신이 운영하던 미술서화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면암이 서울역부터 대마도까지 유배 가는 과정을 기록화적 기법으로 묘사했다. 관악산을 비롯해 남태령 고개와 동작동 등 지리를 위성사진처럼 세밀하게 표현한 게 특징으로 흥미로운 근대문화 사료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유배도는 가로 63.5㎝, 세로 143.5㎝ 크기로 국내에선 처음 발견된 것이다.
유배도를 확대해서 순서대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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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림 아래쪽부터...
사람들이 오가는 숭례문이고 한자로 崇禮門이라고 쓰여 있는게 보인다. 이것은 면암이 숭례문을 나섰다는 의미이고 숭례문 정문에는 총을 든 일경이 지켜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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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숭례문 밖 풍경. 지게와 우마차를 끈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는 저잣거리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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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 면암 일행이(맨 위 인력거를 끄는 일본인 남자와 인력거 위에 탄 사람, 그 뒤에서 호송하는 일경이 보이는 장면.) 있다. 인력거를 탄 사람이 면암이고 한문으로 勉菴崔先生(면암최선생)이라고 씌여 있다. 그 오른쪽에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인력거를 탄 면암 뒤에 장남 최영조, 차남 최영학을 비롯해 임병찬, 임병대, 임응철, 최제태, 최영설, 최만식, 최전구, 이승희 등 10명이 뒤따르고 있다.
이중 임병찬은 면암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애국지사로 면암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됐으나 2년만에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나중에는 일경에 체포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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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의 인력거 확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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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면암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도착한 서울역 풍경.
면암 뿐 아니라 일반 여행객들을 기차역까지 싣고 온 인력거꾼들이 쉬고있는 모습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군장과 소총을 들쳐 멘 일본군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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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을 태운 기차가 하염없이 남쪽으로 향하는 동안 주변 조선 땅의 풍경.
기울어 가는 조선의 운명이 안타까웠던 면암은 과연 이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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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을 태운 기차가 도착한 부산 초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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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에 이르러 면암과 임병찬이 조각배에 오르는 모습이다. 항구는 수심이 얕아 큰 상선이 접안하지 못하므로 우선 작은 배에 타서 큰 배로 옮겨 가기 위함이다. 정말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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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도. 작은 배에 올라타는 선비가 면암인데 거기에도 勉菴崔先生(면암 최선생)이라고 씌여있고 뒤에 임병찬도 한문으로 씌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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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병선(兵船, 군함)이라고 쓰여있고 왼쪽에는 수선(輸船, 상선)이라고 씌여있는 배가 있다. 이 상선에 옮겨타고 오륙도를 거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대마도로 향하는 면암의 모습이다. 뒤에선 면암의 아들과 다른 지인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배웅하고 있다.
면암은 이렇게 일본으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채 결국 1907년 1월 1일 대마도의 감방 안에서 왜구가 주는 밥을 먹을수 없다며 단식 끝에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된 것이다.
 
면암의 유배도를 본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모덕사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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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얼마전이었는데 모덕사는 조용한 가운데 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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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동상, 유품 전시관인 대의관, 그리고 선생이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까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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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진정한 국가관이 무엇인지, 애국이 무엇인지 몸으로 실천하며 알려주신 위대한 선각자이자 선비였고 관료였고 의병장이었던 면암. 다시금 머리숙여 숭모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참고로 이 유배도를 그린 채용신은 조선말기 화가로 인물, 산수, 영모 등 여러 화목에 능했고 특히 초상화가 뛰어나 고종의 어진을 비롯해 100여점의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카메라가 여의치 못했던 당시에 이런 희귀 자료를 그림으로 남겨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재정립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이분께도 역시 후손으로서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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