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 말 근대사의 과도기에서 비운의 삶을 살다간 여인들
예산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애절한 노랫말의 주인공인 ‘수덕사의 여승’에 대해 일엽스님을 지목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이 터무니없는 오해였던 것처럼 ‘ 수덕사 경내에 있는 ‘수덕여관’에 대해 야릇한 상상을 하는 것 또한 큰 오산이다.
경허선사의 계보를 잇는 만공스님 그리고 만공스님의 제자였던 일엽스님이 수덕사와 인연이 깊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명성을 날렸던 나혜석과 이응노화백, 이응노 화백의 전처였던 박귀옥 여사는 수덕여관과 인연이 깊다. 하지만 어찌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떼어서 이야기할 수 있으랴.
문득 이 대목에서 세존의...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 소식에 일엽스님이 남겼다는 게송이 생각난다.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
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
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
신문기사에서 처음 일엽스님의 게송을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내 나름 엉터리 해석을 붙여보면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 본디 처음부터 있던 빛이었는데 여직껏 그 빛을 모르다가 새삼스레 깨달음에 이르러 밝음을 얻었나니 “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밥상에 올라와 있는 밥이 밥이지 빵일리 없으니 누가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다만 허망한 세상의 빛에 가려있던 진리를 보기 위해 세상의 빛을 되돌려서 본래의 밝은 빛을 얻었음이라.
어찌 보면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사이에 두고 일엽스님과 나혜석 그리고 박귀옥이 있었다. 서로 다른 생을 살다간 살아간 이 세 여인들은 각각의 인생의 해법을 찾아 고단하게 살다 간 주인공들이다. 어떤 것이 딱히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독 이 세 여인들 중 구도의 길을 완성한 분은 바로 이야기의 첫 출발점에서 만난 일엽 스님이다.
해방 전,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 금강산 마하연이었다. 일엽은 스승 만공 스님을 따라 그곳에 갔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일엽에게 농을 던졌다.
“밤새 어느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었나?”
일엽 스님은 태연하게 침묵으로 답했다. 언뜻 들으면 성(性) 적인 농담으로 들릴 수 있는 질문이지만 실제는 깨달음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한 선문답이다.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나?’라는 물음에 ‘헤매던 그 자리와 내가 선 이 자리가 둘이 아니다.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는 답을 침묵으로 던진 셈이다. 스승이었던 만공스님이 일엽스님의 깨달음의 깊이를 인정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정도를 가늠해 볼만하다.
그렇다. 일엽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에 나오는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이었다. 한 가지 일엽스님과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내가 태어나던 1971년에 스님이 입적했다는 사실이다. 왠지 모를 생사의 갈림길로부터 우리의 인연을 시작되지 않았을까?
일엽 스님=1896년 평남 용강군 출생. 부친은 개신교 목사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17세에 혼자 남았다. 외할머니 뒷바라지로 이화전문 졸업. 1919년 일본 도쿄의 영화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해 시인·수필가·평론가로 활동하다 1933년께 출가했다. 1971년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