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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근대예술의 산실, 수덕여관을 찾아서

구한 말 근대사의 과도기에서 비운의 삶을 살다간 여인들

2014.07.01(화) 00:06:47 | 조연용 (이메일주소:whdydtnr71@naver.com
               	whdydtnr7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산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애절한 노랫말의 주인공인 ‘수덕사의 여승’에 대해 일엽스님을 지목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이 터무니없는 오해였던 것처럼 ‘ 수덕사 경내에 있는 ‘수덕여관’에 대해 야릇한 상상을 하는 것 또한 큰 오산이다.

경허선사의 계보를 잇는 만공스님 그리고 만공스님의 제자였던 일엽스님이 수덕사와 인연이 깊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명성을 날렸던 나혜석과 이응노화백, 이응노 화백의 전처였던 박귀옥 여사는 수덕여관과 인연이 깊다. 하지만 어찌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떼어서 이야기할 수 있으랴.

문득 이 대목에서 세존의...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 소식에 일엽스님이 남겼다는 게송이 생각난다.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
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
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

신문기사에서 처음 일엽스님의 게송을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내 나름 엉터리 해석을 붙여보면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 본디 처음부터 있던 빛이었는데 여직껏 그 빛을 모르다가 새삼스레 깨달음에 이르러 밝음을 얻었나니 “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밥상에 올라와 있는 밥이 밥이지 빵일리 없으니 누가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다만 허망한 세상의 빛에 가려있던 진리를 보기 위해 세상의 빛을 되돌려서 본래의 밝은 빛을 얻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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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구도의 상징이었던 수덕사와 그 수덕사 가까이 있던 세속의 상징이었던 수덕여관 또한 분별이 사라진 깨달음의 이치에서 보면 본디 다르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수덕사와 수덕여관은 구한말 과도기를 살다간 예술가들의 산실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수덕사의 여승’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자칫 일엽 스님의 구도 길에 어두운 오해의 그림자를 불러낸 것은 출가 전 일엽 스님의 굵직했던 행보에서 연유된다. 출가 전 일엽 스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이면서, 소설가, 수필가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이혼과 자유연애를 직접 경험한 시대를 앞서간 여걸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연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신랑 얼굴 한 번 본적 없이 집안의 권유에 의한 강제 결혼이 문제였다. 사랑도 없는 결혼인데다가 신랑이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운명을 거부하듯 일엽스님은 이혼을 감행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다가 도쿄행 열차 안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하지만 그 운명적인 사랑 또한 남자 집안의 반대로 파국을 맞는다. 결국 미혼모가 된 일엽스님은 연인에게 편지 한 통과 아기를 남겨두고 귀국한 뒤 1933년에 수덕사에서 출가하여 견성함에서 구도의 길을 가게 된다.

일엽스님의 절친이었던 나혜석 또한 우리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파 서양화가이면서 소설가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나혜석 또한 아이 셋과 생이별이라는 결혼 실패의 상처를 안고 일엽 스님을 찾아와 출가 의사를 밝혔으나 일엽스님의 만류에 부딪힌다. 그러자 나혜석은 스님이 되겠다고 간청하며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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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엽스님의 중재로 나혜석을 만난 만공스님은 ‘임자는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던 중에 이응노를 비롯한 후배 예술가들이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교류를 나누게 된다. 당시 청년 화가 이응노는 프랑스 유학과 나혜석으로부터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키워간다. 그러던 중 스승이자 선배였던 나혜석이 1944년 수덕여관을 떠나자 수덕여관을 매입하여 아내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긴다. 그리고는 1958년에 21살 연하 애인과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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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선생의 아내였던 박귀옥여사는 이응노가 떠난 뒤에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며 남편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이응노 선생이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자처하는가 하면 감옥에서 나와 수덕여관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지극 정성으로 이응노를 간호한다. 자신이 버리고 간 아내의 지극한 간호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한 이응노 선생은 수덕여관 앞에 있던 바위에 온갖 사물의 쇠함과 성함을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을 남기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또다시 홀로 남게 된 박귀옥 여사는 마지막까지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며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 박귀옥 여사는 마지막 소원으로 죽은 남편의 뼛가루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으니 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하지만 결국 박귀옥 여사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응노 선생의 프랑스에서의 예술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혼을 해 줬기 때문에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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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사이에 두고 일엽스님과 나혜석 그리고 박귀옥이 있었다. 서로 다른 생을 살다간 살아간 이 세 여인들은 각각의 인생의 해법을 찾아 고단하게 살다 간 주인공들이다. 어떤 것이 딱히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독 이 세 여인들 중 구도의 길을 완성한 분은 바로 이야기의 첫 출발점에서 만난 일엽 스님이다.

해방 전,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 금강산 마하연이었다. 일엽은 스승 만공 스님을 따라 그곳에 갔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일엽에게 농을 던졌다.

“밤새 어느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었나?”

일엽 스님은 태연하게 침묵으로 답했다. 언뜻 들으면 성(性) 적인 농담으로 들릴 수 있는 질문이지만 실제는 깨달음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한 선문답이다.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나?’라는 물음에 ‘헤매던 그 자리와 내가 선 이 자리가 둘이 아니다.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는 답을 침묵으로 던진 셈이다. 스승이었던 만공스님이 일엽스님의 깨달음의 깊이를 인정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정도를 가늠해 볼만하다.

그렇다. 일엽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에 나오는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이었다. 한 가지 일엽스님과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내가 태어나던 1971년에 스님이 입적했다는 사실이다. 왠지 모를 생사의 갈림길로부터 우리의 인연을 시작되지 않았을까?


일엽 스님=1896년 평남 용강군 출생. 부친은 개신교 목사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17세에 혼자 남았다. 외할머니 뒷바라지로 이화전문 졸업. 1919년 일본 도쿄의 영화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해 시인·수필가·평론가로 활동하다 1933년께 출가했다. 1971년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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