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령성지 표지석. 저만치 성곽이 보입니다
▲ 성곽 위로 태양이.
▲ 성곽에 올라 내려다 본 눈 쌓인 석벽
▲ 목곽시설 안내문
▲ 성 내부
▲ 성 북쪽 내부
▲ 성에서 본 허물어진 벽
▲ 테뫼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벽과 산기슭
▲ 가파른 급경사를 이용해 석벽으로 옹벽을 쌓은 성
▲ 성벽과 가파른 급경사
▲ 경사도가 더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곽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성벽 축성방식인 ‘테뫼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궁금증을 가졌을법한 테뫼식이 과연 뭘까요? 그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성벽 축조 방식은 크게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뉩니다.
먼저 테뫼식은 산꼭대기를 평평하게 다듬고 산기슭을 수직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보이지요. ‘테뫼’의 뫼는 산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니까 산에 테를 두른다는 뜻인데 이런 성 안에서 방어를 할 경우 거의 난공불락의 산성이라고 얘기합니다.
공성전(침입자가 성을 공격하고, 수비자가 성 안에서 방어하는 전투) 때에는 이런 경우 공격자의 희생이 엄청 크기 때문에 방어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곡식은 골짜기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쌓아서 문을 통하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고구려 안시성이 포곡식입니다. 이 성들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 사람들의 슬기로움과 자존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죠.
▲ 성 정비를 위해 나무를 깎아 놓은 곳
성의 역사를 간략히 한번 살펴보죠.
백제시대에 견훤이 남이면 대양리(大陽里)에 경양현을 설치하고 금산의 서남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수축한 것입니다.
이후 6·25전쟁 때 이곳이 전라북도 운주와, 충남 논산으로 왕래하는 요충지였기에 북한 공비들이 장기간 은거하면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기도 합니다.
성 안쪽은 넓은 산판길 같은 평지가 있으며 성 안에는 백령성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찾아내지는 못했는데 백령성에서 능선을 타고 1km쯤 올라가면 산봉우리에 봉화대가 있어 진악산의 관양봉 봉수대와 서로 교신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큰 규모도 아닌, 이 작은 성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 성에서 본 동쪽
▲ 성에서 본 서쪽
▲ 성에서 본 남쪽
▲ 성에서 본 북쪽
이곳에 백제말기에 이렇게 작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와 접경지대에 있는 이 지역을 방어하거나 진출을 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은 돌을 쌓은 석성으로 당시는 매우 견고했을 것이란 생각이고, 성의 주변은 경사가 무척 가파릅니다.
만일 이곳에서 적과 교전을 했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고 해도 쉽게 성으로 기어오를 수가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성곽을 들러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봤습니다.
과거에 성이란 전적으로 외침을 막고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본다면 성에 대한 설명으로는 약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성 안에서 그곳 수령을 중심으로 모든 정치적 결정과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문화가 함께 이루어졌을테니까요.
예를 들어 서산의 해미읍성 같은 경우죠. 워낙 크고, 평지이고 주변이 논밭을 포함한 일상 평지였으니 실로 성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으로서의 총체적인 역할을 하기 보다는, 단순히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목적으로만 쌓은 성이 이 백령성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나라와 고을과 백성을 위해 쌓았고, 이젠 세월이 흘러 거의 폐허가 된 오래된 성.
여기저기 흩어진 성벽을 축조했던 돌들이 비탈진 성벽 밑으로 쏟아져 내려,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합니다.
성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