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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2024.07.11(목) 14:13:34홍주신문(uytn24@hanmail.net)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와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전래비(좌측 아래).     

호서의 해안지방인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90년이었다. 서산 지곡면(地谷面) 장현리(長賢里)에서 사는 최형순(崔亨淳)은 1890년 3월 16일에 동학 제2교조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하고 동학에 입도 했기 때문이다. 

최형순은 경주최씨로, 경주로 시제를 다니면서 1890년 무렵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동학을 전수받아 포덕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형순은 충청도 전역을 무대로 하고, 주로 서산·태안지역을 중심으로 동학 교리를 포교하니 뜻밖에도 호응이 좋았다. 자기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태안 이원면 포지리와 원북면 방갈리를 오가며 전교를 해 동학의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1893년(癸巳) 2월 초순경 상암(湘菴) 박희인(朴熙寅)이 그릇장수로 변장해 가시내(開市浦)에 들어와서 조운삼(曺雲三)을 입도 시키고, 다시 갈머리 마을에 들어가서 문장준(文章竣)과 문장로(文章魯), 문구석(文龜錫) 부자를 입도 시켰다, 그리고 조석헌(曺錫憲)은 그다음 해인 1894년에 박희인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고 그해 5월에 태안접주로 피임됐다.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이래, 급성장한 교세는 대부분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림을 받아 지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한 태안지역 동학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왕성했던 이유는, 특히 태안지역에서도 원북 방갈리(기포지;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와 근흥 수룡리, 이원 포지리가 교세가 강했다. 그곳은 지리적 조건과 신망 있는 지도자 등 여러 여건이 좌우됐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이미 최형순에 의해 입도한 동학교도와 박희인에 의해 입도한 교도들이 합세, 방갈리의 동학 세력은 날로 확산돼 갔다. 특히 갈머리(葛頭里) 문구석의 집과 가시내 조문필(曺文必)의 집에서 교도들이 비밀리에 모여 동학 교리를 박희인으로부터 직접 강의를 받았고, 수룡리 문동하(文東夏) 집에서도 교육을 실시, 그 효과가 나날이 커졌다. 세력이 확대돼 불과 2~3년 동안에 군 전역으로 교세가 큰 세력으로 뿌리내렸다. 이 과정에서 조석헌, 문장준, 문동하의 역할이 돋보였다.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태안관아 동학군 점령지.

■  고받는 농민들의 참담한 현실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예포(禮包;예산지방의 포)와 덕포(德包;덕산지방의 포) 소속 북접 동학교도들은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홍주, 서산, 태안 등지에서 동학도소(東學道所)를 설치하고 기세를 떨치자 이 지역의 수 많은 민중들도 자진해서 다 함께 동학에 입도해 합류했다. 이 무렵 태안관아에서 일하던 김엽춘(金葉春) 이방(吏房)이 태안관아에서 10월 1일에 동학 지도자 처형 계획을 동학 접주에게 알렸다. 바로 이 소식을 접한 동학의 지도자는 곧바로 예포대도소(禮包大都所)에 치보(馳報;급히 달려가서 알리는 일)했다. 9월 29일 늦게 태안 동학교도들에게 법소로부터 훈시문이 당도했다. 빨리 기포해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이때 태안부사(泰安府使) 신백희(申百熙)와 별유사(別諭使) 김경제(金慶濟;태안출신으로 문과급제 후 홍문관 교리로 있었음)는 동학교도들을 강제로 귀화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으며, 동학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고자 지도급 인사들을 모두 체포해 처단하기로 했다. 따라서 동학교도 지도자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해 수감했다. 그리고 10월 1일에 태안관아에서 모두 처형하기로 했다.

이 무렵 태안지역은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다른 지방보다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거의 모든 관직이 물건처럼 가격을 정해 돈이나 재물을 받고 매관매직하던 시대였다. 수령은 2∼3만 냥이었고 관찰사(觀察使)는 100만 냥으로 사고팔았다고 한다. 관직은 내직보다는 지역을 담당하는 목부군수인 수령이 더 비쌌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방의 수령이 되면 백성들에게서 수탈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공공연하게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해 매관매직(賣官賣職)하고,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벼슬을 얻기 위해 그동안 상납했던 본전을 보충하기 위해 양반들과 공모, 무고한 농민들을 애매모호한 죄목을 씌워 옥에 가두고 토지와 재물을 갈취했다. 또한 농민들에게는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설상가상으로 한해 농사를 지어야 겨우 소작료를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고, 춘궁기에 비싼 장리 쌀을 얻어다 먹어야 했다. 지주들은 흉년이 들어도 소작료를 그대로 받고, 소작인과의 금전거래에도 고리대금으로 고혈을 빨아먹었다. 이렇게 인권이 유린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 고통받는 농민들의 참담한 현실은 참아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특히 1893년에는 태안부사 신백희는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과 공모, 속전(贖錢)이라는 세목으로 태안 관내의 동학교도들로부터 6만 6000냥을 강제징수하는 등 가진 횡포를 부렸다.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 백화산 기슭의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포(內浦)지역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起包地)는 근흥면 수룡리에 있는 토성산성(吐城山城)과 원북면 방갈리(현재의 태안화력발전소 자리), 남면과 안면도 등지이다.

동학농민군들이 1894년 9월 그믐날 토성산성에 거점을 두고 집결했다. 화순(和順) 접주 문동하(文東夏)가 동경대전 교리강의를 하면서 살기 좋고 복된 나라를 만들어 자손만대에 물려주자고 역설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선창하자, 이에 동학교도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주문을 복창하니 산천이 진동하고 사기가 충천했다.

이어서 이순화(李順夏) 접주가 대중 앞에 나서더니 아래와 같은 격문을 읽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곳까지 이른 것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자는 것이요.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를 축출하고, 밖으로는 광폭한 강적의 무리를 제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작은 벼슬아치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10월 1일 태안군아를 에워싼 동학농민군들은 태안 관아에 투옥된 동학 두목 30여 명을 처형 직전에 무사히 구출하고, 관아에서 태안부사 신백희와 별유사 김경제를 결박해 경이정(憬夷亭) 아래에서 타살했다. 이렇게 삽시간 운명이 바뀌고 그동안 농민의 고혈을 빨고 가렴주구를 하던 포악한 관료의 학대에 그 원한이 쌓이고 누적돼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태안성이 함락돼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급보를 접한 홍주목(洪州牧)에서 영병(營兵) 500여 명이 급파돼 태안성을 수복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폭정에 시달리고 기아선상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의 민심을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이 난리를 평정한다는 구실로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비인도적인 악행을 자행했다. 이 참혹한 수모를 참다못해 일반 동학인과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 싸우지 않으면 살길이 없고, 또한 이 길만이 후회를 남기지 않은 길이니 다시 일어나자고 부르짖었다.

이에 동의한 동학농민군들은 경이정에 모여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드디어 10월 15일 태안에서 다시 기포하기에 이르렀다. 10월 24일 당진 면천(沔川)의 승전곡(勝戰谷) 전투와 10월 26일 예산 신례원(觀爵里)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10월 28일에 홍주성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패전했으며, 11월 7일 해미성 전투와 그다음 날인 8일 최후의 매현(梅峴) 전투에서 완전 패퇴했다.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동학농민군 처형지 목네미샘(이원면 사창리).

동학농민군들은 태안 백화산(白華山)에서 항전하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성(吐城山城)으로 숨어들었다. 토성산성은 동학농민군이 많은 희생자를 내고 태안성을 점령하기 위해 집결했던 곳이다. 관군은 토성산 전투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자신들의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작두로 머리를 잘라 지역의 동학교도의 집에 보관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원면 사창3리 ‘목네미샘’은 원래 ‘목 넷이 떨어진 샘’으로도 불렸는데, ‘목이 없는 동학농민군 시신을 방치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토성산성은 태안 근흥면 수룡리(和順)에 있고, 군사 요충지로 백제 시대에 축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산성에서 신화 같은 전설을 지닌 비극적인 옛이야기들이 지금도 구전돼 동네 사람들이 실화처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체포된 동학농민군들은 대부분 처형됐다. 태안 백화산 추모탑이 서 있는 곳에서도 그렇게 쓰러졌다. 

1960년대 들어 태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추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돼 1965년부터 동학농민군 순도자 명단(288명)이 작성됐다. 1970년에는 위령제가 열렸고 1977년 2월에는 갑오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건립위원회가 발기돼 1978년 11월 백화산 기슭에 추모탑을 제막했다. 2021년 10월에는 태안이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의 최후 항전지임을 알리는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백화산 교장(絞杖)바위(동학농민군들이 교살되거나 장살된 처형지) 아래 기슭에 세워졌다. 2020년 3월부터 77억여 원을 들여 태안 남문리 380-3,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항전지인 백화산 자락에 지하 1층·지상 2층(건물면적 1586㎡) 규모로 건립했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세 번째로 건립됐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의 진원지이자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항전지로 알려져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영원한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옮겨가고 변해간다. 마치 강물이 제자리에 고여 있지 않듯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태안관아 동학농민군 점령지 경이정.
호서 해안 ‘태안’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지 사진
태안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현 태안화력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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