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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독립사상의 요람 고성 건봉사

홍주인물열전 - 만해 한용운

2024.07.08(월) 16:44:45홍주신문(hjn@hjn24.com)

한용운 독립사상의 요람 고성 건봉사 사진

■인제 만해마을
지난 6월 8일. 비 내리는 길을 달려 강원도로 향했다. 목적지는 인제 만해마을과 고성 건봉사이다. 결성향교에서는 매월 둘째 주에 <홍주인물열전>이라는 테마로 홍주 인물 관련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답사 목적은 홍주 인물의 업적을 배우고, 선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6월의 홍주 인물은 만해 한용운으로 정했다. 만해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오세암이나 백담사, 심우장 등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만해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의외로 많다. 그중에서도 이번 답사에서는 인제 만해마을과 고성 건봉사를 답사하기로 했다. 만해마을은 시인 한용운의 문학을 선양하기 위해 매년 만해축전을 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금강산 건봉사는 만해의 독립투쟁에 발판이 되어준 우리나라 최북단의 사찰이다.

백담사와 건봉사는 서울과 일본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할 정도로 근대적 교육에 주력하는 사찰이었다. 이 두 사찰은 만해에게 근대의식을 심어준 사찰이다. 이 중에서 이번 답사지인 건봉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한용운 독립사상의 요람 고성 건봉사 사진

■건봉사 일주문인 불이문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만해와 금암으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까지 호국의 기치가 면면히 이어져 온 사찰이다.

1928년 만해가 지은 건봉사의 역사책인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520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때 이름은 ‘원각사(圓覺寺)’였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수하였고,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하여 ‘서봉사(西鳳寺)’로 개칭하였다. 1358년에 무학대사의 스승이 나옹화상이 다시 중수하면서 ‘건봉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세조가 건봉사를 원당으로 삼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으며, 열성조의 어필이 봉안된 곳이라 조정에서도 특별히 세금을 탕감해 주었고, 이를 발판으로 번창하여 1878년 대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된 건물이 3183간이었다고 한다. 화재 이후 복구를 계속하여, 일제강점기까지 642간이 복원되었다. 하지만 1945~1950년까지 북한에 속해 있었고, 6·25 전쟁 때 일주문인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4년부터 대웅전을 시작으로 복원을 시작한 결과이며, 복원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서기 758년 발징 화상이 만인염불(만일 동안 염불을 하는 것)을 시작한 이래 만해의 은사인 만화 관준 대선사가 1881년 제4차 만일염불을 결사하고, 만해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한다. 정법안장이란 진실하고, 불편부당한 부처님의 마음이 지혜의 눈으로 일체 사물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선법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한용운 독립사상의 요람 고성 건봉사 사진

■고성 건봉사
1906년 건봉사는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이루기 위해 봉명학교를 설립한다. 1907년 1월 26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봉명학교 설립취지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봉명(鳳鳴)’은 소소(韶簫;중국 순임금이 요임금을 찬탄하기 위해 지은 음악)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날아오도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뜻을 같이하여 같은 소리로 찾아서 불교의 큰 방법도 연구하고 신학문 교육에 참여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 “비유하자면 보약을 달여서 우리 백성들을 치료하여 여윈 몸이 다시 건강해진다면 대장부들이 이 세상에 뽐내어 이 시대의 인재가 되리라. 그리하여 독립운동도 잘해내고 자유도 잘 누리게 되리니 어떤 적인들 굴복하지 않겠으며, 어떤 일인들 못 이루겠는가.”

봉명학교는 진학순을 교장으로 금암 의훈을 회계원으로 임명하고, 만해의 강연으로 민족정신을 기르는 한편, 영어, 수학, 지리, 역사 등을 교육하는 신식학교였다. 독립 항쟁에 앞장설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였던 것이다. 금암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의병 투쟁을 하다가 건봉사로 출가하였고, 5차 만일염불회 회주를 맡았던 스님이다.  

봉명학교는 설립되자마자 1907년 1월 대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즈음 만해의 행보를 살펴보면, 만해는 1908년부터 6개월 간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와 교토 등에서 일본의 풍물은 물론 근대화된 문물을 접하게 되고, 최린과 교우하게 된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만해는 만주와 시베리아 등을 방랑한다. 이때 이시영·박은식·김동삼·윤세복·이동하 등과 조우하며, 독립운동을 협의했다. 이러한 만남은 이후 만해의 독립투쟁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해는 1913년 국내로 돌아왔다.

한편 봉명학교에서는 학생축구단이 1933년 4월 축구를 매개로 지역 공동체와 백성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관동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같은 해 <부처님 오신 날> 봉축 행사로 가장행렬을 펼치다가 기습적으로 만세 항쟁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조선총독부에게 눈엣가시였다. 결국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어 수업이라는 이유로 봉명학교를 강제 폐교시켰다. 

또한, 3·1 운동 이후 1920년대 활발히 전개되던 청년 승려들의 움직임이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비밀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이 태동되었다. 1924년 이후 만해와 자주 교류하던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이 뜻을 모아 1930년 5월에 19명이 만당을 조직하고, 만해를 당수로 추대하였다. 건봉사도 20여 명의 청년들이 <전국 불교전문 강원>을 결성하고, 만당에 적극 참여했다.  

이렇듯 봉명학교와 건봉사는 인재를 배출하여, 독립항쟁사 곳곳에 기록을 남겼다. 건봉사는 원효대사, 보조국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으로 이어지는 호국정신을 이어 일제강점기 국운을 바로 세우는 것에 주도적으로 앞장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해는 출가 이후 맺게 된 인연을 통해 진보적 인물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암울한 시대 속에 한송이 연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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