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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공세리성당’ 곡식창고 위에 아름다운 성당 세우다

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

2024.07.08(월) 06:18:02홍주신문(uytn24@hanmail.net)

아산 공세리 성지성당 박물관(1922년 건립한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
아산 공세리 성지성당 박물관(1922년 건립한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공세리성당은 아산호방조제와 삽교천방조제를 잇는 아산 인주면 공세리에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각각 대표하는 곡창인 안성평야와 내포평야가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일대는 공세곶으로 불렀는데, ‘곶(串)’이란 바다로 내민 땅을 말한다. 바다가 육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이곳은 조선 시대 충청도 아산·홍주·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곡(租稅穀)를 쌓아 두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다. 

따라서 공세리성당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의외로 백성의 고혈과 같은 세금과 관련된 곳이다. 이런 특성으로 조선 시대 조창(漕倉)이 있었고,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뱃길을 이용해 도성(都城)으로 나르기 위한 창고이자 전진기지였다. 1523년(중종 18) 80여 칸의 창고를 지어 세곡을 보관했고, 1631년(인조 9)에는 창성을 쌓아 1865년(고종 2) 조창제가 폐지될 때까지 운영했고, 조창제가 폐지돼 공진창도 기능을 잃게 됐다. 지금도 공세리성당 인근에는 공세창 유적으로 석벽과 석축, 관련 비석 등이 남아있다.

공세리는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어 일찍이 어업이 발달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포구마을이었다. 조선 시대 물길이 좋아 세미를 모아 운반하는 곶창을 만들고 공진창이라 했다. ‘공세리(貢稅里)’라는 땅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공세리는 조선 시대 충청 지방의 조세미를 모아 운반하던 공세곶창이 있었기에 일찍부터 공세지, 공세포, 공세곶고지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흥면 서강리, 하신원리와 현내면의 동강리 일부를 병합, 공세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됐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가 됐다. 자연스럽게 마을의 특징인 공세곶창의 의미를 담아 ‘공세리’라 이름 붙였다.
 

삼십이위순교자현양비.
삼십이위순교자현양비.

■ 드비즈 신부,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설계
이곳은 내포지역의 관문으로 한국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복음이 전파됐다. 이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보존한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인 1890년에는 충청도 최초의 성당 양촌본당(陽村本堂, 구 합덕성당의 전신)이 설립된다. 공세리성당은 양촌본당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 분리·창설됐으며, 초대 본당 주임은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였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초석이 됐다.

1894년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2만 명 남짓했고, 이 가운데 3755명이 충청도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피에르 파스키에 신부와 장 퀴를리에 신부는 당시 신창과 덕산을 본당(本堂)으로 충청도의 동북쪽과 서남쪽을 맡고 있었다. 신창과 덕산은 오늘날에는 각각 아산과 예산 땅의 일부다. 같은 해 동학농민봉기 과정에서 조조 신부가 피살됐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조선을 떠났고, 후임으로 에밀 드비즈 신부가 임명된다.

당시 충청도는 53곳의 공소가 있었는데, 공세리 골뫼마을도 그 하나였다. 이 마을에는 박해 이전부터 교인이 몰려 살았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이곳을 일찍부터 새로운 신앙의 거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가 조선을 잠시 떠나기 전 조선교구장 구스타브 뮤텔 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해변에 위치하고, 또 두 개의 큰 강이 삼각주를 이루는 지류 사이에 있는 이 마을은 땅이 매우 비옥해 논농사가 잘됩니다. 마을 앞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10리 떨어진 곳의 아산읍내을 굽어보는 높은 산맥의 끝부분입니다. 언덕의 정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일찍이 그 안에 정부의 곡식창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높은 곳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면 멋질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파스키에 신부의 꿈을 현실로 만든 이가 공세리에서 34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한 드비즈 신부다. 성일론(成一論) 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드비즈 신부는 1871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에서 태어났다. 1894년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이듬해 공세리본당의 초대 주임신부가 됐다. 그런데 1년 만에 주교관의 경리인 당가(當家) 신부로 임명됐다. 2대 본당신부는 기낭이었는데, 드비즈는 이듬해 3대 본당 신부로 공세리에 돌아온다.

공세리는 조선 시대 공세지(貢稅地)로 불렸다. 1523년(중종 18) 80칸 규모의 창고가 들어섰지만 1762년(영조 18) 해운창이 폐지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됐다. 하지만 조창이 폐지됐다고는 해도 그 터는 국유지였다. 당연히 매매가 금지됐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립 주역인 최석우 몬시뇰에 따르면 당시 편법이 통하는 탐관오리가 없지 않아 사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문제가 됐음에도 드비즈 신부는 “정부가 관리를 잘못한 책임을 교회가 질 수는 없다”는 논리로 버텼고, 결국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게 됐다는 것이다.

드비즈 신부는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해 성당으로 꾸몄고, 갑작스런 교구의 발령으로 잠시 본당을 떠났다가 1897년 6월에 2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를 이어서 다시 3대 주임 신부로 부임해 폐지된 공세창 일부를 매입한다. 20대의 젊은 사제는 1897~1899년 한옥식으로 성당, 사제관, 부속 건물을 세웠고 1921년 지금의 성당을 지었다.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사제관 건물도 이때 함께 세운 것이다. 드비즈 신부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고 한다. 드비즈 신부도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그 결과 아름다운 공세리성당을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공세리성당 말고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과 수원성당, 그리고 서울 혜화동성당도 설계했다고 한다.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했다. 이후 1930년까지 34년간 본당 사목을 담당해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며 발전의 터를 닦았다.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사업에도 앞장서 전교를 통해 지역 인재 발굴에도 기여했다. 1920년대 들어 신자 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감독해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현 박물관)을 완공했다. 이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했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 별관을 완공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 성당 찾는 사람들, 모두 천주교 신자 아냐
조선 시대 초기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세곡(稅穀)은 경양포, 공세곶, 범근내에서 수집해 세곡선에 실었다. 고려 시대 하양창이라 불린 경양포는 안성천 하류의 평택 팽성의 조창이었다. 범근내는 삽교천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세곡창고는 당진 면천에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각 조창이 세곡을 걷은 지역적 범위가 적혀 있는데, 경양포는 직산과 평택뿐으로 조창으로의 기능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반면 공세곶은 청주, 목천, 전의, 은진, 연산, 회덕, 공주, 천안, 문의 등 충청도 지역 15개 고을을 관할했다. 범근내에는 서천, 한산, 남포, 보령, 홍주, 청양, 태안, 서산, 예산 등 16개 고을 세곡이 한데 모였다.

공세리 조창 폐지 이후 주변 해안에서는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지금도 공세리성당을 찾으면 이곳이 과거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였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드비즈 신부가 ‘이 마을은 땅이 매우 비옥해 논농사가 잘 된다’고 했던 것도 간척 사업의 결과였을 것이다. 천주교 탄압 이후 산골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든 것도 농사지을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세리성당은 어느 때나 아름답지만 고목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에 감춰졌던 성당 건물이 낙엽과 함께 조금씩 드러나는 때가 가장 정감이 있다. 절을 찾는 사람이 모두 불교 신자가 아니듯 공세리성당을 찾는 사람들도 모두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종교는 달라도 성소(聖所)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려는 탐방객들이 많은 까닭이다. 공세리성당은 서양의 고딕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지었지만, 입구에서부터 한국인들의 생활 습관에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금의 공세리성당은 드비즈 신부가 설계한 당초의 모습은 아니라고 전한다. 1971년 3000명 남짓으로 늘어난 신자를 수용하기 어려워지면서 13대 주임 김동욱 신부가 북쪽의 제대(祭臺) 부분을 늘리는 방법으로 증축해 오늘의 모습이 됐다고 한다. 공세리성당을 찾으면 옛 사제관을 개조한 박물관을 돌아보면 순교의 역사를 포함한 이 지역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또한 조창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은 공세리성당 탐방의 덤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이곳이 조창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작은 글씨로 길게 적혀 있지만 한 번쯤 읽어 보면 사연을 알 수 있다. 성당의 주출입구인 주차장 서쪽에서 조금만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언덕 주변에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그 아래 밭에는 아직도 조창 시절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썼음직한 조선 시대의 막사발 조각들이 굴러다닌다.

공세리성당에서 아산 쪽으로 나가는 길가에는 치성(雉城)처럼 보이는 본격적인 성벽의 흔적이 있다. 그 아래는 조선 시대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해운판관(海運判官)의 선정비다. 해운판관이란 충청도·전라도의 조창을 순회하며 세곡의 선적을 감독하고 경창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독려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다. 공세곶이 조창이었다는 직접적 증거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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