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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윤봉길의사 기념관 방문 추념하기

윤봉길 의사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24.06.23(일) 11:42:04류두희(ryu545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는 윤봉길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준사관 임관 동기들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독립운동을 했던 윤봉길 의사에 대한 생애나 삶의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윤봉길기념관」을 찾았다.

충의사 입구
▲ 충의사 입구

우리를 먼저 반긴 사람은 이곳 문화관광해설사님이었다.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홍살문을 지나면서 전체적인 지형설명과 함께 윤봉길 의사의 사당이 있는 충의사, 배우자 배용순여사의 묘소지역, 윤 의사가 태어난 광현당 지역, 윤 의사가 성장했던 저한당 지역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역 설명하는 문화관광해설사
▲ 지역 설명하는 문화관광해설사

우리 일행은 33년 이상 군에서 근무했던 제대군인들인 만큼, 우선 윤봉길의사의 초상화가 있는 사당 충의사에 올라갔다.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민다음 그 분의 영정 앞에 묵념을 올렸다.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한 몸을 바쳐 일본에 항거했던 충심을 오래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알리겠노라’는 다짐도 했다.

묵념하는 모습
▲ 묵념하는 모습

윤봉길 의사에 대한 설명 청취
▲ 윤봉길 의사에 대한 설명 청취

매헌 윤봉길의사가 태어나고 네 살 때까지 살았다는 광현당은 전체적으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어서 찾아갈 수 없었지만, 네 살 때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던 저한당을 찾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윤 의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김선자 해설사님의 생생하고도 진지한 모습에 푹 빠져들었다.

저한당 모습
▲ 저한당 모습

윤 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을 품고 자퇴를 한 다음,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해설을 듣는 모습
▲ 해설을 듣는 모습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고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어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아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윤봉길 기념관 이모저모
▲ 윤봉길 기념관 이모저모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선생에게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성장했던 지역
▲ 성장했던 지역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 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천장절 행사에 이어 일본인들만 남아 열리는 축하연의 묵념을 올리는 순간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단상으로 던졌다. 일본경찰에 잡히는 순간에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장,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 제9사단장 우에다겐키치 중장과 주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당하는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동상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40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윤봉길 의사 일대기 체험관
▲ 윤봉길 의사 일대기 체험관

윤봉길기념관에는 윤 의사님이 살아온 생애는 물론 성장과정과 활동사항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회중시계를 비롯해 68점의 유품이 제 568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방문한 6월 15일에는 기념관 전체를 보수 중에 있어 관람하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보수작업중인 윤봉길기념관
▲ 보수작업중인 윤봉길기념관

윤봉길의사님이 15세 때 결혼해 8년을 함께 살았던 배용순 여사님이 돌아가신 뒤 서울 효창공원에 합장을 원하지 않고 윤 의사님의 사당을 지키겠다는 의지에 따라 충의사를 늘 바라보고 있는 배용순 여사님의 묘소도 저 멀리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윤봉길기념관을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에 잠시 멈춰 서서 한동안 예산군의 세심한 배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차장에 마련된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구역’이란 간판을 보고 “우리나라 어느 유적지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예산군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예산군의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알 수 있겠다“ 등 한마디씩 던지며 부러워했다. 물론 다음날 예산시장을 갔을 때도 주차장에 똑같은 주차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구역
▲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구역

우리 일행 대부분 서울에서 내려왔고 광주광역시에서 한 팀 그리고 충청도에 살고 있는 필자 등 20여명이 충남 예산에서 함께한 1박 2일간 윤봉길의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고 예산군민들이 너나없이 관광안내인처럼 친절한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리더의 마인드가 예산을 되살리고 있다는 확신을 받았습니다. 예산 파이팅!!!


윤봉길의사기념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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