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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날 기념 인터뷰] “할아버지는 의병…아버지는 순사 피해 숨어다녔죠”

정주원 의병장의 손자 ‘정완택’(74) 옹<BR>고대면 용두리 출신 정주원 의병장…경기 일대 활동<BR>약 500명 의병 거느려…송악읍 가학리에 묘소 자리해

2024.06.16(일) 20:35:58(주)주간당진시대신문사(pkm9407@naver.com)


<편집자주> 의병의 경우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많은 의병이 후손 없이 사망하거나 일제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의병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그대로 보존하기란 쉽지 않다. 당진에서도 의병으로 활동했던 분들의 후손이 알려지고, 행장이 명확한 경우는 최구현 의병장과 정주원 의병장이란다. 이날 열린 기념식에서 당진출신 정주원 의병장의 손자인 정완택 옹이 당진을 방문했다. 정완택 옹에게 짧게나마 인터뷰를 청했다. 

당진출신 정주원 의병장 후손 정완택 씨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 당진출신 정주원 의병장 후손 정완택 씨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정주원 의병장의 손자 정완택 옹은 현재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광현 당진시 문화체육과 문화재팀장과 전화통화 중 의병의 날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이날 당진을 방문했다.

정완택 옹의 할아버지 ‘정주원’ 의병장은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창의한 당진 출신 의병장이다. 일제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시키자, 정주원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정주원 의병장은 죽산, 수원, 안성 등 경기도 일대에서 항전했고, 배를 이용해 당진과 서산 등지로 이동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남광현 문화재팀장은 “정주원 의병장은 안성, 용인 등 일대에서 약 5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의병 활동을 한 분”이라면서 “소난지도 쪽에도 왔다 갔다 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한때 정주원 의병장은 경기, 충남북 지역의 의병 연합체인 13진도 총대장에 추대되기도 했다고. 

정주원은 충청, 경기지역의 의병들로 연합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경찰서를 공격하고 우편체송인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 외에도 친일세력과 의병을 고발하는 자들을 처단했다. 

이외에도 여러 전과를 올리다가 1908년 4월 당진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이 시기 당진과 서산 일대에서의 의병 활동은 대부분이 정주원 부대의 활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표적인 의병이었다. 1908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 당진의병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됐다.

한편 정주원 의병장은 체포되기 전, 대호지면 적서리에 사는 차숙보의 집에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대호지면의 대성인 차씨 문중의 보호를 받으며 당진포 건너의 천연 요새지인 적서리 방구바위 산기슭에서 활터와 과녁을 만들어 놓고 호위병과 마을 장정들을 훈련시켰다고.

일본에 체포된 정주원은 1908년 11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 유형과 징역 3년으로 감형 받았다. 복역 후 석방돼 송악면 가학리에서 거주하다가 1925년 1월 경기도 평택시에서 57세 나이로 사망했다.

3녀1남 중 막내이자 3대 독자인 정완택 옹은 “할아버지가 의병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도 고생을 무척 했다”면서 “일제가 아버지도 죽이려고 하니 숨어다녔다”고 전했다. 아무런 재산도 없어 곡마단에 숨어 생활을 이어가려고 해도 어느 순간 일본 순사들이 찾아와 쫓겨다녔다고. 정완택 옹은 “생존해계신 큰 누님에게, 할아버지가 쫓겨다니니까 가끔 말 타고 집에 오셨다가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물건 등을 챙길 새도 없었다.

남광현 문화재팀장은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의 의병사가 안타깝다고 말한다.

남 팀장은 “우리의 의병 역사나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다”면서 “당시에 의병으로 활동했던 기록을 들키면 가족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지니까 보존하기 어렵고, 또 도망다니면 활동했기에 기록을 남길 여지가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일제에 붙잡혀서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신 분들은 기록이 없다”면서 “대부분 의병은 자기 재산을 다 탕진해서 의병 활동을 하고, 그러다 결국 혹독하게 돌아가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한편 정주원 의병장의 묘소가 송악읍 가학리에 자리해 있다.

정주원 의병장의 묘소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 정주원 의병장의 묘소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묘 옆에 자리한 정주원 의병장의 숭의비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 묘 옆에 자리한 정주원 의병장의 숭의비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정주원 의병장 숭의비 뒷모습

▲ 정주원 의병장 숭의비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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