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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2024.04.18(목) 18:53:46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왕이기전에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였다. 평생을 같이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정치적인 상황에 휩싸여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왕에게는 선택권이 많지가 않았다.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 옹립이 되었고 그는 평생을 기득권세력인 훈구파와 새로운 신진세력 사림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였다. 어느 시대이고 보수와 진보는 있었다. 10대 중반을 약간 넘은 나이에 왕실에 들어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면서 그 위세가 당당했던 경빈 박 씨와 반공신의 딸인 희빈 홍 씨의 사이에서 절치부심을 하였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이 길은 조선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보원사라는 사찰이 자리했던 폐사지인 보원사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곳에서 명종의 태를 묻은 태실은 직선거리로 3km가 채 되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이제 벚꽃이 모두 져버리고 이제 5월의 장미를 기다리고 있다. 지인도 최근에 갔다 왔다는 개심사에는 2010년 큰 산사태가 일어났다. 태풍 곤파스가 충남을 강타하면서 지나간 것이었다. 그때 개심사에서는 오래된 목판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폐사지가 된 보원사보다는 개심사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태풍으로 인해 흙더미가 된 곳에서 찾아낸 경판의 기록에는 간행된 것이 개심사가 아니라 바로 이곳 보원사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산만 하나 넘어가면 개심사가 나온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개심사에는 경허당을 포함해 16~17세기 조선 초중기 간행한 18종 421판의 목판이 보관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14종이 이 폐사된 보원사 터에서 임진왜란 전인 16세기 중반에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곳에서 만들어졌을까.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 씨, 희빈 홍 씨, 창빈 박 씨 사이에서 참고 지냈던 여성은 30 중반을 앞두고 대군을 낳게 된다. 그 대군이 훗날 이곳에 태실을 만들고 왕위에 오른 명종이다. 명종의 어머니는 조선 왕실에서 강했던 여성 문정왕후다. 그녀는 조선의 정국을 바꾸기 위해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반하여 불교를 부흥시키려 했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왕실에서 만들었던 경판들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망자의 영혼이 극락에 천도하기를 기원하는 대규모 의식인 수륙재에 얽힌 내용이 절반 이상인 불서가 찍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백제 때 처음 개창됐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보원사는 통일신라 때 여러 고승들이 계를 받았고, 고려시대 광종 재위기에는 나라의 국사로 추앙받던 탄문 대사가 학문을 익히고 말년 입적한 절로 융성했던 곳이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태실은 1538년 명종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문정왕후 등 왕실 주도로 건립된 시설이다. 그리고 보원사의 조선초기 불서 간행 활동 시기가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문정왕후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여성이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로 양분되었던 조선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정치력을 발휘했었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정보가 그렇게 넘쳐나고 찾아보려고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도 어떤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 사람에 대한 평가다. 하물며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과거에는 힘 있는 사람들의 기록으로 남아있게 마련이었다.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내포신도시라고 불렸던 곳이며 가야산과 명종의 태실이 있는 이곳은 조선왕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이 아닐까. 

서산의 명종 태실과 폐사지로 남겨진 보원사의 흔적 사진

명종이 즉위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부양하기로 결심하고 그 명분으로 사찰의 양성화를 내걸었다. 문정대비는 인간 평등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서를 차별하지 않았으므로 종친들에게도 관대했다고 한다. 그녀가 꿈꾸었던 세상은 그녀가 65세로 세상을 떠나자 보원사에서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조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보원사지오층석탑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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