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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2022.08.23(화) 20:01:33들꽃지기(psh3441@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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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전경>

보령의 상징인 성주산을 병풍으로 드넓게 자리 잡은 옛 절터인 성주사지
. 통일신라시대의 중심 사찰이었던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지만, 절터에 남아 있는 수많은 국보와 보물인 석탑들과 석등, 탑비들이 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지금도 절터 곳곳을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천년역사관>

성주사지 입구의 왼쪽에는 근래에 건축된 천년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성주사의 가람변천 및 발굴 과정, 각종 유물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는데, 아침 일찍 방문하는 바람에 문이 닫혀 있어서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운영시간은 09:00~17:00(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은 휴관)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능소화>

성주사 절터가 시작되는 초입에 철 늦은 능소화 몇 송이가 관람객을 반겨주고 있었다
. 화사함을 자랑하는 능소화가 오늘은 개화기를 훌쩍 지나 피어서인지 옛 절터 고즈넉한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듯 쓸쓸하게 느껴진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폐사지의 돌계단을 오르면 맨 먼저 석등을 마주하게 된다
.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석등은 높이 220cm에 재질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지붕돌은 팔각형이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9호 

석등 바로 뒤에 이곳 절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보물 제19호인 이 석탑은 높이 660cm이며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되어 있으며 지대석 위의 상대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어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석계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오층석탑 바로 뒤에 위치한 돌계단은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 돌계단 양쪽에 수법이 뛰어난 사자 조각상이 세워져 있기도 했는데, 1986년에 도난당하고 지금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되어 세워져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보물 제2021

오층석탑 뒤에 3기의 석탑이 동서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 중 동쪽에 위치한 석탑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중앙(中央)삼층석탑> 보물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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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 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며 재료는 반려암, 높이는 410cm이다.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서(西)삼층석탑> 보물 제47호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점은 3기의 삼층석탑 모두 동일하며,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과 상대석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높이는 400cm이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석불입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사이에 세워진 민불
(民佛)이며, 본래는 절 주변에 있던 것을 어느 시기에 이곳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얼굴 일부분이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 제8호 

옛 절터에 남아있는 유물 중 하이라이트인 낭혜화상탑비는 무염국사 입적 두 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조각 솜씨도 뛰어나 신라 부도비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보령 성주사지 사진

<개망초와 성주사지

드넓은 절터를 가득 채운 개망초 군락.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이 개망초는 그저 그 자리에 피어있을 뿐인데 억울하게도 농사를 망치는 꽃이라 하여 사람들에 의해 개망초란 이름으로 불리는 비운의 꽃이다. 한때 승려들만 해도 2천여 명에 이르렀고 9천여 평의 부지 위에 1,100여 칸에 이르는 큰 절이었다가 지금은 쇠락하여 그 흔적들만 남아서 덧없음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주는 성주사지와 개망초 군락이 서로를 보듬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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