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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

이정록 시인의 서랍

2022.06.15(수) 16:14:55도정신문(scottju@korea.kr)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아이의 겨드랑이에 인형이 있다.
오른 손등이 젖자
왼 손등으로 닦는다.
인형이 반대쪽 겨드랑이에 있다. 
그렇게 다섯 번이나 오간다.
천천히 옮겨가는 동안,
인형의 손과 팔과 엉덩이가
아이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울음이 멎는 동안, 인형은
울먹임을 조금씩 들이마신다. 
겨드랑이에서 나온 인형이
울음 그친 아이를 바라본다.
인형의 눈동자로 옮겨 간
우는 아이의 반짝이는 눈물이.

『지구의 맛』 한겨레아이들


우는 아이 사진


감정의 모양은,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 있다. 

<부라리다>란 말에는 확장되는 분노의 웅덩이에서 포탄이 솟구치고 불화살이 날아온다. <식식거리다>는 말에는 쇳물이 끓는 거푸집이 보인다. 주물틀 밑에 불똥을 맞은 맨발이 있다. <슬픔, 배고픔, 아픔, 서글픔….>이란 말에는 현재의 가문 웅덩이에 먼 앞날의 말라붙은 소금호수가 잇대어 있다. 마음의 웅덩이가 텅 비어 있다. <그립다>란 말에는 끊임없이 샘솟는 실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수놓는 것 같다. 때로 바늘에 찔려 빨간 동백꽃이 피기도 한다. <오싹하다>란 말에는 등짝 골짜기를 중심으로 내 몸이 접힐 것 같다. 몸에도 계절이 있다면, 그 등골로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복수초꽃이 눈을 털어낼 것 같다. 

감정은 옳고 그름이 없다.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는 웃음인데, 다른 이에겐 눈물일 수도 있다. 경험의 차이로 저마다 감정의 잣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고 기겁할 수도 있다. 자라보다 크고, 뜨겁고, 김이 솟구치는 헛것이 공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라 보고 놀랐던 이가 솥뚜껑을 비웃을 수도 있다. 

시 속에 한 아이가 울음을 오므리려고 애쓰고 있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처럼 눈물이 어둠을 닦아내고 있다. 손등으로 슬픔을 조그맣게 다지고 뭉쳐서 인형의 눈알에 옮겨준다. 슬픔을 나눈 인형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감정이 곧 몸이기 때문이다.

‘눈물’이란 말과 ‘뚝!’이란 명령어는 언제나 짝이 아니다. ‘뚝!’은 폭력이다. 아이의 울음을 틀어막는 용당포(김종삼의 시 「민간인」에 나온, 울음 우는 영아를 삼켜버린 곳)는 사라져야 한다. 울음이 왜 왔는지? 그 울음에 이름을 붙이도록, 우는 아이와 오래도록 말을 나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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