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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실향민의 삶을 기록하다-1

박음전 어르신, "전쟁은 없어야지...겨울이면 생각나는 1.4후퇴"

2017.12.21(목) 02:11:42금강마음(msim1174@naver.com)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온 대적적인 예언서 정감록에는 열곳의 대표적인 피난처 십승지가 기록 되어있다.

박음전 어르신 구술모습

▲ 박음전 어르신 구술모습


 

이는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당시,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십승지의 존재는 살고싶은 명소였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한다.

김명진(경북대)교수가 면담하고 있다.

▲ 김명진(경북대)교수가 면담하고 있다.


 

또한 6.25전쟁때 북쪽에 살던 사람들도 전쟁을 피해 십승지를 찾아와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이에 지난 11월부터 12월까지 국가기록원 주관으로 충청예술컴퍼니가 수행하는 민간기록 구술채록 연구사업이 문경호 교수(공주대), 김명진 교수(경북대), 조운득 연구원(공주대 공주학연구원) 등과 특급뉴스가 참여해 이들의 옛 이야기를 통해 유구읍에 정착하게 된 이들의 배경을 들어봤다.

 

이 연구에 참여한 사람은 박음전(85), 이찬구(80), 유의수(85), 정관술(88), 고명준(84) 5분의 어르신의 구술채록을 했다.

문경호 (공주대)교수가 면담하고 있다.

▲ 문경호 (공주대)교수가 면담하고 있다.


 

첫 번째로 박음전 어르신에 대한 구술을 게재, 이들이 피난하여 유구읍에 정착하게 된 배경과 북쪽에 고향얘기를 게재한다.

 

박음전 어르신 면담은 1122일 어르신 자택에서 김명진 교수의 면담으로 진행됐다.

박음전 어르신은 황해도 벽성군 나덕면 통산리가 고향으로 아버지 박천모(문의 박씨),어머니 조선비(함안 조씨)4남매 중 맏이로 19341210(음력) 태어났다.

 

박 어르신은 여덟살에 황해도 수양산 신광사 절에 할머니를 따라 불성 드리러 간 기억과 그 할머니가 손바닥 만큼 큰 황해도 만두를 잘 빚어주신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면담을 마치고 박음전 구술자와 함께 기념촬영

▲ 면담을 마치고 박음전 구술자와 함께 기념촬영


 

박 어르신은 열한살에 떠난 고향마을을 큰 아들이 인공위성을 통해 보여 주어서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울되면 논이 꽝꽝 언 땅에서 썰매타던 기억과 여름이면 논에서 우렁잡다가 업고 있던 동생을 훌렁 논바닥에 빠뜨려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해 나는 곳에서 옷을 벗겨 짜가지고 말려 입혀서 들어갔던 추억을 떠올린다.

 

11살에 8.15해방을 맞이했을 때 일본사람 한명이 와 가지고 숨겨달라고 했으며, 야학을 꿈꾸다가 12살에 재산몰수를 당하고 쫓겨나 소달구지를 구입해서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박 어르신과 동생 이렇게 다섯이서 고향을 등졌다.

 

그렇게 서울에 와서 동생둘이 태어났다.

박 어르신이 비단 짜는 것을 배울만할때쯤 아버지가 안동으로 이사가자고 해서 풍기, 영주, 안동 등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빨치산 습격을 겪어서 겁나서 충북 부강으로 이사, 그곳에서 6.25 사변이 터져, 대평리 둔곡으로 이사했다.

이사도중 반격포가 떨어지는 것도 봤고, 어둔밤 콩밭에도 숨어봤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고향에 가자는 말과 정감록을 믿는 어머니 사이에서 아버지 말을 따라 고향으로 북으로 밀고 가는 군인들 따라 갔다.

4-5년만에 가본 고향집에는 남이 살고 있어 가지 못한 채 큰아버지네집에서 사나흘 있다가 큰 집 동네 빈집에서 한달 열사흘 만에 1.4후퇴를 맞았다.

 

박 어르신은 배를 타고 연평도를 건너 먼저 남으로 간 아버지를 찾아 오던 일, 냄비에 수술쌀죽을 끓여 먹던 일, 아구리선과 똑딱선을 탔던 일, 인천 유리공장이 수용소로 그곳 생활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음전 어르신이 만든 송편

▲ 박음전 어르신이 만든 송편


 

그렇게 피난을 오던 중에 먼저 떠난 아버지를 부강에서 만났다. 박 어르신은 195217세에 유구로 가족이 이사왔다.

유구에서는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수직기로 이탈리아 수입실로 풍기와 마찬가지로 인조 비단을 짰으며, 뒤에는 이를 토대로 다른 고장을 돌며 장사도 했다.

 

박 어르신은 일제 강점기와 그 힘든 피난길을 겪고 났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현재 유구읍에 혼자 사시면서 독실한 카톨릭신자로 믿음생활을 하고 계시다.

이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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