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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최초 복음의 빛이 전해진 곳

봄나들이-잘 몰랐던 우리지역 명소 ‘여사울성지’

2013.05.06(월) 13:46:15무한정보신문(jsa7@yesm.kr)

5월 1일 내포성지순례단이 이존창 사도 생가터 잔디밭에서 출발의식을 갖고 있다.

▲ 5월 1일 내포성지순례단이 이존창 사도 생가터 잔디밭에서 출발의식을 갖고 있다.


1일 오전 9시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조용하던 시골마을에 3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운동화 차림의 이들은 매년 5월 1일과 9월 1일 두차례 진행되는 내포성지순례단이다.

천주교대전교구가 주관하는 이번 순례는 이존창 생가터가 있는 여사울성지를 출발해 합덕성당을 거쳐 솔뫼성지에서 마무리된다. 9월 순례길은 거꾸로 솔뫼성지에서 출발해 여사울성지가 목적지다.

천주교에서는 5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 온 성지순례길인데, 최근 예산을 비롯해 홍성, 당진, 서산이 함께 내포문화숲길사업에 포함돼 이정표를 세우는 등 일반인들의 접근도를 높여주고 있다.

외래종교로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정착하기까지 개화기 한국역사에 큰 획을 그은 천주교의 성지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관광자원으로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내포천주교길순례단이 여사울성지를 떠나 합덕성당을 향해 걷고 있다.

▲ 내포천주교길순례단이 여사울성지를 떠나 합덕성당을 향해 걷고 있다.


예산군도 지난해 말 여사울성지에서 덕산 광천저수지까지 약 30㎞ 구간을 정비해 ‘천주교순례길’로 이름짓고 이정표와 정자 등을 마련해 놓았다.

이 순례길 전체를 모두 걷기 어렵다면 형형색색 영산홍이 피어 봄기운이 물씬한, 아늑하고 이국적인 여사울성지 나들이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단순히 봄볕을 즐기며 바람을 쏘이는 성과 외에 또 다른 ‘무엇’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008년 충남도기념물 제199호로 지정된 뒤, 2010년 새로 건축된 성당과 사제관은 이국적인 건축디자인임에도 농촌마을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2010년 완공된 여사울성당. 파스텔 색조의 포근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다.

▲ 2010년 완공된 여사울성당. 파스텔 색조의 포근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다.


충청도 최초 복음의 빛이 전해진 곳 사진

 


파스텔톤의 따뜻한 색조가 어우러진 성당건물은 프로방스풍으로 높은 십자가나 첨탑이 없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성당 윗 부분에 라틴어로 ‘DOMINUS VOBIS CUM(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이라는 글씨가 써 있다.

성당 앞에는 이존창 사도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조성돼 있다. 성모상과 십자고상, 십자가의 길이 천주교의 성지임을 알게하지만, 타종교인들이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하다.

성당 뒤편 사제관 옆쪽으로는 옛 성당이 그대로 남아있다. 1958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프랑스 작은 성당의 외형과 닮았다. 윤인규 주임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성당의 규모에 따라 건축양식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 성당의 규모와 외형은 작은 시골마을에 깃들어 사는 은둔자들이나 마을 주민들이 소박하게 짓는 성당의 모습이라고 한다. 건축 당시 예산성당(오리동성당) 주임신부였던 보드뱅신부가 프랑스인이었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958년 건축된 옛 성당. 이 작은 성당의 건축디자인은 프랑스 시골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 1958년 건축된 옛 성당. 이 작은 성당의 건축디자인은 프랑스 시골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여사울성당은 그 이전에도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한 때 주민의 80%정도가 천주교 신자였을 정도로 교세가 커 성당의 규모를 계속 확장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이존창 사도가 고향인 이 마을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세웠던 초창기 성당과 현재 마을회관자리에 있던 두번째 성당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고령화와 이농으로 마을 인구가 크게 줄고, 외지에서 전입해오는 세대들이 늘면서 천주교 신자 비율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충남도지정 기념물의 정식 명칭은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이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여사울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이며, 충청도에서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되어 복음의 빛이 전해진 곳이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는 여사울은 내포 천주교회의 심장이자, 신앙의 고향이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순교자의 못자리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

한국천주교회 못자리 만들다

이존창(1752-1801) 사도(使徒)는 누구?

 

이존창은 1759년(영조35년) 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여사울 부농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이존창은 면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 당시 대학자인 권일신의 제자가 됐다.

스승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된 이존창은 1784년 영세를 받고 첫 신자가 됨으로서 충청도 천주교의 역사가 본격 시작됐다.

충청도의 전교책임을 지고 고향으로 내려온 이존창은 가족과 친지를 비롯해 약 300여명을 천주교로 이끌었다. 그는 이후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미, 덕산, 홍성, 서산 등 내포 여러 고을의 농민, 빈민 등 서민층에 천주교를 전파, 내포지방은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가 됐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구한말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만큼 전교에 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가 이존창의 조카딸이며,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고향을 떠나 홍산(지금의 부여), 금산 등으로 이사 다니면서 몰래 전도에 몰두했다. 충청도 전역으로 천주교가 전파된 것.

1795년 말 다시 체포된 이존창은 고향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01년 서울로 압송돼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감사가 있는 공주로 호송돼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천주교는 한국천주교회의 고향을 세운 이존창의 집터를 성지로 가꾸고 비를 세웠다. 그의 묘는 확인 할 수는 없으나 경주 이씨 문중의 여사울 산에 있는 20여기의 무덤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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