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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2010.05.12(수) 잎싹(kji206@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시내를 벗어나 공주시청를 지나면 부여 방면으로 약 2㎞ 지점에 우금치 터널직전 우측으로 빠지면 우금치고개(공주시 금학동 산 78-1번지 일대)를 만날 수 있다.

공주분지의 남단에 형성된 우금치고개는 부여에서 공주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이며 과거에는 공주 남쪽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사진  
▲동학혁명군 전적비(사적제387호)

우금치의 우금(牛禁)은 옛날에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아 해가 저문 뒤에 소를 몰고 이 고개를 넘어가다 소를 빼앗기는 일이 잦아 밤에는 소를 몰고 가지 못하도록 금하였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 옛날에 이 고개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하여 '牛金峙(우금치)'라고 쓰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동학군의 한이 서린 곳,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우금치고개 일원은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최후·최대의 격전지이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탐관오리의 학정과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한 동학혁명군은 공주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곳 우금치를 점령하기 위해 이 고개를 공략했다.

40~50여 차례 이 고개를 넘기 위해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 접전을 벌렸지만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의 방어벽을 결국 넘지 못하였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무참하게 희생된 동학군의 시체는 산을 덮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전봉준은 체포되어 처형되고 전국을 뒤흔든 농민혁명은 실패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사진  
▲봉화대와 돌탑들

동학의 아우성이 꺾인 통한의 땅, 우금치전적지에는 1973년 동학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날의 아픔을 추모하는 동학혁명군전적비가 세워졌다.

1994년 3월 17일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자료참고)

전적비뒤로는 봉화대가 있으며 돌탑들이 그날의 원혼을 달래듯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사진  
▲우금치 터널위 고개마루에 서있는 거대한 조형물들

기념비 좌측으로 터널 위쪽에 걸어올라갔더니 뜻하지 않게 널직한 터널위 고개마루에는 거대한 대나무 조형물이 세워져있었다.

어떤 의미의 조형물인지 모르지만 뜻하지 않은 만남이라 조금 놀라웠다.

고개마루의 바람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한 뜻인지 그날의 아픔을 대변하듯 조형물 하나는 넘어져 있었다.

  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사진  

특별한 대나무 조형물은 오래된 풍경처럼 설치미술관을 온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눈부신 한낮, 하늘은 유달리 시퍼렇다.

조형물은 파란 눈물이 뚝뚝 떨어질듯한 하늘아래 동학군의 원혼을 달래듯 오늘도 말없이 바람소리만 가득안고 묵묵히 서있는것 같다.

 

  우금치, 그날의 아픔을 아시나요 사진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니 등산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녀와서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우금치고개는 공주시가 공주경찰서두리봉~우금티고개~오곡동~봉화대에 이르는 공주대간 중 우금티고개~오곡동~봉화대~충령탑에 이르는 10㎞구간 코스중하나였다. 언제 시간되면 역사탐방코스와 더불어 동학의 의미를 곰씹어보는 산행을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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