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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공주 교동 성당을 찾다

사람은 왜 종교를 믿을까?

충남 공주시 교동 118-2

2024.06.25(화) 12:46:22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상
▲ 성모 마리아상

충남 공주시 무령로191(교동 118-2번지)에 위치한 <천주교 대전교구 공주 교동 성당>은 1982년 9월 17일에 설립되었다. 공주 교동 성당에 들어서면 ‘순교 현양비’와 성모마리아상이 가장 먼저 눈길을 붙잡는다.  

순교(殉敎)는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말한다.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또한 현양(顯揚)은 이러한 실천으로 이름, 지위 따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냄을 의미한다.

순교 현양비
▲ 순교 현양비
 
‘순교 현양’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공주의 옥’을 알아야 한다. 이는 1791년의 신해 박해 이래 약 100년 동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 신앙을 증리하거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본래의 옥은 이곳 교동 성당 인근의 유림회관 자리에 있었으나, 장소 때문에 여기에 현양비를 세우게 되었다. 박해 때마다 공주로 끌려온 신자들 중에서 참수형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교동 성당의 상징물
▲ 교동 성당의 상징물

반면에 교수형을 받은 이들은 이곳 옥에서 순교하였으며, 그 수도 참수형을 받은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순교 터도 바로 이곳이다.
 
이 현양비는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의 빛을 밝힌 순교 선조를 기리며, 그분들의 거룩한 신앙을 이어받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모든 신자들의 뜻을 한데 모아 세우게 되었다.

교동 성당의 출입문
▲ 교동 성당의 출입문

평소 역사와 종교에 관심이 많은 터여서 공주 교동 성당을 찾았다.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 역사는 조선시대에 있었다. 먼저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시작되어 약 8년간 지속된 박해로, 전국에서 5,000∼8,000명의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동 성당의 대문
▲ 교동 성당의 대문

이 중 성직자와 평신도를 합쳐 총 24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조정이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고 백성들에게 척화사상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론자 말고는 누구나 믿는 종교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종교를 믿는 까닭은 인간의 삶과 죽음, 도덕적 가치, 그리고 세상의 기원 등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교동 성당의 우뚝함
▲ 교동 성당의 우뚝함

또한, 종교는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제공하고, 사회적 지지를 제공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이밖에 종교는 현세의 고난과 내세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멀리서도 잘 보여요
▲ 멀리서도 잘 보여요

어떤 종교든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종교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다.

교동 성당의 상징물
▲ 교동 성당의 상징물

교동성당
충남 공주시 무령로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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