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역사

효(孝)를 생각하며... _ 다섯 정문(旌門) 이야기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봉항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648-1

2024.03.25(월) 20:12:29 | 유정민 (이메일주소:mm041@daum.net
               	mm041@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을 말한다.
▶ 정문(旌門) :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가 모범으로 표창한 충신·효자·열녀 등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색의 문을 가리키는 유교 기호로 홍살문, 정려문, 작설, 홍문 등으로 불렸다.

1

▲ 매당 노인사랑의집 효 비


효(孝)
라는 한자는 '지팡이 짚은 노인(老)을 아들(子)이 업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1

▲ 효자 이순학 정문 


정문(旌門)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살던 동네나 집 앞에 세워, 효도를 하지 못하거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고 뉘우쳐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에 정문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태조가 공신을 표창하면서 사당을 짓도록 하였고, 사당 앞에 정문을 세워 그 공을 표창한 것이 최초라 하는데, 효자, 열녀에 대한 최초의 정문은 1431년(세종 13년)에 내렸다고 한다.

꽃샘추위가 잠시 주춤한 지난 16일(토),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와 봉황리에 소재하는 정문을 찾아 그 주인공들이 행했던 효행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 효자 김인석 정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648-1)

1

▲ 효자 김인석 정문


천안 실록에는 '까마귀와 호랑이도 감동한 효자 김인석'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김인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약을 다 드렸으나 차도가 없자, 밤마다 만뢰산에 올라 천지신명께 기도하던 중 지쳐 쓰러졌고, 깨어보니 험한 산중의 위험을 큰 호랑이 두 마리가 좌우에서 지켰다고 한다.

1

▲ 효자 김인석 정문


그런 효성에도 결국 아버지가 죽자 목이 터져라 호곡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상여가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별안간 검은 까마귀 한 떼가 날아와 상여를 에워싸는 순간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장지에 도착한 후 하관하자 까마귀 떼가 모두 사라졌다고 전한다.
까마귀는 효를 아는 새로 알려졌는데, 효성이 지극했던 김인석의 효심에 감동을 받은 동물까지도 함께 슬퍼하였나 보다.

1

▲ 효자 김인석 현액


4면이 홍살로 이루어진 정문 안에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김인석 지문'이라 적힌 현액이 걸려있으며, 38세의 짧은 세상을 마친 효자 김인석은 영조 49년 (1773년)에 그의 효성이 세상에 알려져 정려를 명하고 교지가 내려졌으며, 두메산골 봉암이라는 마을 입구에 깨끗이 단청된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1

▲ 2기의 정문


김인석 정문에서 길 건너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2기의 정문이 보이는데, 아래가 이귀웅의 정문이고 위쪽은 이순학의 정문으로, 이 깊은 산골은 예로부터 효를 배우고 실천하는데 진심이었던 고을이지 않았을까?


▷ 효자 이귀웅 정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800-1)

1

▲ 효자 이귀웅 정문


4면에 홍살을 세운 정문은 영조 5년(1729년)에 정려가 내려지고 세워진 효자 이귀웅의 정문으로, 아버지의 병으로 생긴 종기를 모두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고 피를 드려 깨어나게 했다고 전한다.

1

▲ 효자 이귀웅 현액


이귀웅 정문에 걸린 현액에는 '효자 병절교위 행 용양위부사과 이귀웅 지문'이라 적혀 있다.

1

▲ 이귀웅 정문과 이순학 정문


이귀웅 정문에서 30여 m 정도의 거리에는 효자 이순학의 정문이 있다.


▷ 효자 이순학 정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산 147)

1

▲ 효자 이순학 정문


4면에 홍살이 세워지고 좌우 측면에 방풍판을 단 이순학의 정문은 영조 5년(1729년)에 정려되고 세워졌다.
이순학은 힘든 살림에도 부모를 공양하는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었고, 아버지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아 건강 상태를 알았으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3년이나 연장하였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날엔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으나, 봉분 주위는 청명하여 사람들은 이를 두고 '신의 눈물'이라 말하였다. 

1

▲ 효자 이순학 현액


삼 년 시묘를 하는 동안에도 흐트러짐 없이 항시 정결하였다고 전하는데, 이순학 정문에 걸린 현액에는 '효자 통정대부 이순학 지문'이라 적혀있다.


▷ 효자 한범이 정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산 39-1)

1

▲ 효자 한범이 정문


봉황리에서 병천면 소재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측 산기슭으로 정문 1기가 보인다.

1

▲ 효자 한범이 정문


한시도 부모 공양에 소홀하지 않았고, 부모 병 중에는 자신이 병을 대신하도록 기도하였으며,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시켰다고 한다. 부모 돌아가신 후 6년이나 시묘를 하였으며 나이가 들어 후학들을 자신의 자식들과 동등하게 정성으로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고 전한다. 

1

▲ 효자 한범이 현액


지역 유림들이 상소하여 철종 6년(1885년)에 조정에서 정려가 내렸으나, 가세가 어려워 135년이 지난 1990년에 자손들에 의해 세워진 정문 안에는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한범이 지 정려'라 적힌 현액이 걸려있다.


▷ 수안 이씨 효자 2정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523-4)

1

▲ 효자 2정문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고 4면은 홍살을 세웠다.
한 정문에 2개의 정려가 함께 하니, 우측은 효자 이복장의 정려이고, 좌측은 이복장의 손자 이번의 정려이다.

1

▲ 효자 2정문


이복장은 나이 9세에 모친이 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니 신기하게 병이 나았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가솔과 주민 수백 명을 데리고 작성산으로 피신하여 산성을 쌓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고 전하는데, 숙종 때에 와서 충효로 정문을 마을 입구에 세워 공의 행실을 귀감하도록 하였다.
이복장의 손자 이번은 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기에 나이 어려 상복하지 못하였음을 평생 죄인으로 생각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1

▲ 효자 2정문 현액


손자 이번의 현액에는 '효자 승의랑 이공번 지문'이라 적혔고, 이복장의 현액에는 '효자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지제교 행 통덕랑 사헌부지평 이공복장 지문'이라 적혔으며, 효자 2정문 안에 2개의 현액이 걸려있다.

1

▲ 효자 2정문


주위에 알려져서 정려된 흔적이 이 정도이니, 알려지지 않은 효자와 열녀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한마을에서 이처럼 많은 정문을 볼 수 있음은 효(孝)와 예(禮)를 중시하던 우리 조상들의 올곧은 성품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부모를 극진히 모셨던 옛 효자들의 흔적을 통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효(孝)의 의미를 마음속에 다시 한번 새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이번 글을 마친다.
 
 

유정민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유정민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