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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조선시대 재실의 흔적이 있는 계룡시의 모원재와 묘역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 281-1

2024.01.02(화) 23:06:39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전라남도의 담양이라는 지역은 떡갈비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곳에는 충남의 기호유학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뿌리가 시작되기도 했다. 신라의 왕자였던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말기에 무진주(武珍州)라는 곳에 옮겨가서 학문을 닦고 살았다고 한다. 그 지역이 지금의 담양군 지역이다. 무진주라는 지역이 후에 광산으로 개칭이 되었기 때문에 김흥광은 광산 김 씨의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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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광산김 씨의 후손들은  조선조에 왕비 1명, 상신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공신 7명, 문과 급제자 265명을 배출하였다. 계룡시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면서 대제학 7명이 우리나라 예학의 대두 문원공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후손에서 나와 사계 가문의 월등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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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원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인조 원년(1623)에 지은 모원재는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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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재는 조선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김국광(金國光)(1415∼1480) 선생의 재실(齋室)로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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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광은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 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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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은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해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면서 불만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다. 이시애의 난은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함경도가 떨어져 나가 하나의 국가로 세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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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시의 왕대리라는 지역에 광산 김 씨 묘역이 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역은 계룡이 아닌 논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 김국광은 정유년(1477, 성종 8)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1478, 성종 9)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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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황금이 아닌 지금이라고 했던가. 김국광의 묘소를 비롯하여 그 후손들의 모역이 잘 보존이 되고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관리로서의 재간과 능력)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던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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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위세가 있었던 집안들은 종가의 재산도 관리하는 기능도 있었다. 시향제나 묘사의 준비장소로서의 기능을 비롯하여 선산·종산·위토 등 문중공유재산문제, 재실의 유지나 수축문제도 다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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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묘를 쓰는 경우는 많지가 않을 듯하다. 최근에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화장등을 해서 묘를 쓰지 않고 바다에 뿌렸다. 그 아들들도 서로 보지 않게 될 듯하다. 이제 대가족이라던가 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등의 연대의식도 점점 흐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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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으로 올라와서 재실인 모원재를 내려다보았다. 재실은 문중회의라던가 원거리에 있는 친인척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었지만 더 빨리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 거의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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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라고 했던가.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에서 어떤 가치가 의미 있고 어떤 가지를 지향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봐야 하는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왕대리광산김씨모역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2길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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