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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한 여름의 계룡시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의 고택과 옛사람

2023.08.02(수) 11:09:18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지난해의 여름이 어떠했는지 2년 전의 여름은 어떠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론 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무엇을 했는지는 다시 연상해 볼 수는 있다. 시공간이 붕괴되지 않는 이상 지난해의 여름이 올해 여름이 될 수는 없다. 앞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기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지라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 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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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은 지금 옛사람들이 생각하는 땅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이곳은 계룡시에 자리한 사계 고택이라는 곳이다. 사계 김장생이 살던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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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린 폭우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물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집들은 대부분 땅에서 위로 올려져서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는 물에 약하기 때문에 기단은 돌로 사용했다. 기호유학의 대학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흔적은 신독재 김집이나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초려 이유태 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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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유학이라고 하면 아주 머나먼 이야기 같지만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는 항상 생각 속의 생태계를 만들어가면서 살아왔다. 문명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기반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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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고택의 일부는 이렇게 전시공간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사계 김장생 고택들의 배치를 한눈에 볼 수가 있다. 사계 김장생고택은 계룡시에서 가장 잘 관리되고 유지고 있는 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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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의 고택도 인공 생태계이기도 한 농업이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은 오랜 시간 농업기반으로 문명이 유지되어 왔다. 사계 김장생고택에도 적지 않은 노비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택은 비움의 미학이 있다. 서양인들과 달리 동양인들은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을 만들고 그 비움을 이용해 그릇을 만들고 그것이 지금의 도자기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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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고택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이 꽃가마를 타고 들어왔을까. 고택 안에는 옛날 꽃가마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지만 타는 차량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마는 그것을 타는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신분에 따라 가마의 종류와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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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 어머니 왕대비가 서원부부인(사계선생 증손부)에게 보낸 한글편지도 이곳에서 볼 수가 있다. 사계 선생은 문묘에 제사하도록 숙종 43년(1717)에 정부가 교지를 내렸다. 사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국가사회에 기여하였고 특히 예약의 대가로서 인간생활의 도덕성 확립에 이바지한 공이 컸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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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안에 여성이 들어올 때 호랑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 특히 홀로 어두운 산길을 갈 때 호랑이가 그 앞을 인도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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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의 삶을 살짝 엿보고 다시 여름에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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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선생의 부인인 염선재 할머니의 하루를 1박 2일 체험을 통해 전통문화를 배우고 숭고한 예학정신과 문화예술의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행사가 7월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예학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55세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살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3년상을 마치고 스스로 식음을 끊고 따라갔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없는 봄 그리고 여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사계고택
충남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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