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의 읍성은 고려 때부터 왜구가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하여 조선 태종 17년부터 축성되어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이 배치되는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갖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오래전 이 성의 이름은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성 둘레에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다고 합니다.
근래에 이르러 1974년 동문, 서문이 복원되었고 성내에서 객사와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성안에서 자랐던 나무들은 마차와 무기로 제작되었고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으며 소나무와 함께 대나무도 엄청나게 많아 활과 화살을 만들고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 때 재료로 사용하는 등 전투에 필요한 재료를 자급자족하며 유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성곽 밖
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이순신 장군이 부임하였으며 이곳에서 10개월간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역시 이곳은 조선시대의 군 주둔지였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라는 죄인이 되어 해미읍성으로 귀양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으로 서산의 랜드마크 관광지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해미읍성을 돌아보다 보면 수백 년은 족히 넘은 회화나무가 홀연히 서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형장의 교수대가 되어 목숨을 앗아간 비운을 간직한 나무입니다. 1800년대에 수많은 천주교도를 고문했던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회화나무에 천주교도들을 매달고 모진 고문을 자행했고 병인박해 당시에는 1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큰 아픔이 있는 곳이었기에 교황님도 다녀가신 것으로 압니다. 사실상, 이 회화나무는 슬픔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해미읍성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저 여행 와서 보고만 갈 수가 없는 비운의 회화나무를 보며 그 당시의 억울함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었던 천주교도인들의 절개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