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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해미읍성

2023.03.08(수) 05:39:55 | 캔디요기 (이메일주소:king2001kak@naver.com
               	king2001kak@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읍성안의 조형물
▲ 읍성 안의 조형물

서산 해미의 읍성은 고려 때부터 왜구가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하여 조선 태종 17년부터 축성되어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이 배치되는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갖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오래전 이 성의 이름은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성 둘레에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다고 합니다.

근래에 이르러 1974년 동문, 서문이 복원되었고 성내에서 객사와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성안에서 자랐던 나무들은 마차와 무기로 제작되었고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으며 소나무와 함께 대나무도 엄청나게 많아 활과 화살을 만들고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 때 재료로 사용하는 등 전투에 필요한 재료를 자급자족하며 유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곽 밖
▲ 성곽 밖

해미읍성 1

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이순신 장군이 부임하였으며 이곳에서 10개월간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역시 이곳은 조선시대의 군 주둔지였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라는 죄인이 되어  해미읍성으로 귀양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해미읍성 2

해미읍성 3

해미읍성 4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으로 서산의 랜드마크 관광지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해미읍성 5

해미읍성을 돌아보다 보면 수백 년은 족히 넘은 회화나무가 홀연히 서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형장의 교수대가 되어 목숨을 앗아간 비운을 간직한 나무입니다. 1800년대에 수많은 천주교도를 고문했던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회화나무에 천주교도들을 매달고 모진 고문을 자행했고 병인박해 당시에는 1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큰 아픔이 있는 곳이었기에  교황님도 다녀가신 것으로 압니다. 사실상, 이 회화나무는 슬픔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해미읍성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저 여행 와서 보고만 갈 수가 없는 비운의 회화나무를 보며 그 당시의 억울함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었던 천주교도인들의 절개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해미읍성 6

해미읍성 7

해미읍성 8

해미읍성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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