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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김구 은신처 자백 받기 위해 사형 집행 연기하다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15)오사카 위수구금소로 이송

2022.11.14(월) 23:26:3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 위수구금소로 호송 중인 자동차(대판조일신문, 1932년 11월 21일)

▲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 위수구금소로 호송 중인 자동차(대판조일신문, 1932년 11월 21일)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상해의거로 체포된 지 불과 한 달도 안되어 전격적으로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윤봉길의 사형 선고는 시라카와의 병세와 관련이 있었다. 시라카와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병세가 악화되자 그가 죽기 전에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해파견군 사령관대리의 명령으로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다. 김구의 은신처를 자백 받기 위한 때문이었다. 상해 일본영사관에서는 김구에게 처음에는 20만원의 현상금을 붙였다가 다음에는 일본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상해주둔군 사령부 등에서 일화 6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에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당시 60만원의 값어치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0억 원이 넘는다. 

그런데 중국과의 정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군이 철병하게 되었다. 헌병대도 전원 귀국하기로 하고 유치장 시설이 불완전하다면서 윤봉길을 일본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윤봉길은 11월 28일 일본 우편수송선 다이요마루(大洋丸)에 실려 상해를 출발하여 고베(新戶) 항 바깥의 와다미사키(和田岬)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본 신문 보도에 의하면, 배안에서의 윤봉길은 ‘말없이 창백한 얼굴이었으며, 여름용 메리야쓰 셔츠 위에 엷은 갈색의 양복과  춘추복 외투를 입었고, 머리는 길었으나 수염을 깎은 흔적이 푸르고,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매우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윤봉길은 오사카에서 온 사복 헌병들에게 인계되어 오사카 육군 위수구금소의 독방에 수용되었다. 황색으로 된 죄수복을 입었다. 식사는 군인들에게 주는 것이 제공되었다. 

윤봉길이 오사카에 구금되어 있을 때 일본반제동맹 오사카지방위원회에서는 “조선인이 배출한 반제국주의자 윤봉길의 총살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키자”라고 쓰인 인쇄물을 비밀리에 살포하였다. 오사카 지역은 특히 한인 노동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오사카 한인들은 오사카의 텐노지(天王寺) 앞 광장에서 조선총독의 폭압정치에 대한 반대 시위를 전개한 바 있다. 오사카에서 사형을 집행하는데 부담감을 갖게 된 일제는 윤봉길을 12월 18일 가나자와로 이송하였다. 가나자와에서는 헌병대는 물론이고 경찰이 총동원되어 윤봉길을 군용차에 태워 오후 5시경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 가두었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김구은신처자백받기위해사형집행연기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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