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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의거 직후 체포돼 가혹한 고문 견디다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14) 연행되어 가는 윤봉길

2022.11.07(월) 15:31:24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大阪朝日新聞(대판조일신문), 1932년 5월 1일 호외, ‘체포된 수류탄투척의 범인 윤봉길’

▲ 大阪朝日新聞(대판조일신문), 1932년 5월 1일 호외, ‘체포된 수류탄투척의 범인 윤봉길’


 

투척한 폭탄은 정확하게 단상 위의 중앙에 서 있는 시게미쓰와 노무라 사이에 떨어졌다. 시라카와 대장은 얼굴에 부상을, 시게미쓰 공사는 발에 중상을 입었으며, 무라이 총영사는 얼굴과 왼쪽 발에 부상, 노무라 사령장관은 머리와 발에 중상, 상해거류 일본민단장 가와바타는 배와 다리에 중상, 도모노 민단서기장은 발, 얼굴, 손에 부상을 입었다. 가와바타의 부상이 가장 심하여 단상 위에 꿇어앉아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사망하였다.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처음에는 병상에서 집무를 볼 정도였으나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에서 일본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시게미츠 마모루였다. 시라카와는 얼굴과 복부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5월 20일부터 혈변이 보이는 등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패혈 증세가 나타났으며 의료진이 긴급 수혈을 하고 대수술을 실시하는 등 치료를 했다. 일왕은 5월 23일 남작 작위와 사주(賜酒)를 내리는 등 특별대우를 했으나, 결국 5월 26일 사망했다. 일제는 그의 죽음을 ‘전상사(戰傷死)’로 처리하였다. 이와 같이 시라카와를 ‘전상사’로 처리함은 윤봉길 의거가 ‘테러’가 아닌 독립운동임을 일제가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윤봉길은 투척과 동시에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시락형 폭탄을 주우려 하였다. 자살용 폭탄이었다. 그러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 고모토(後本武彦) 일등병조와 헌병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어서 일본 군중들에 의해 기절할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옷이 찢겨지고 얼굴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본 헌병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윤봉길을 끌어냈다.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옷소매 사이로도 피가 흘러내렸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태연하게 냉소를 지으며 헌병대로 끌려갔다. 

윤봉길은 홍구공원 맞은 편의 상해 제1헌병분대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자신이 폭탄을 투척한 사실을 시인하고 주소, 직업, 나이, 이름 등을 밝혔다. 그날 상해파견군헌병대 본부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심문을 받았다. 다급해진 일본 헌병은 입을 열게 하려고 온갖 가혹한 고문을 모두 동원하였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문으로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윤봉길은 자신의 행위임을 시인한 것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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