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역사

논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서재필 박사를 집중 조명한다.

서재필 박사의 본가지가 있는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

2022.09.21(수) 07:05:03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재필 박사라고 하면 무엇부터 생각이 나시나요?
독립신문, 독립협회, 갑신정변, 만민공동회 등 학교에서 배웠던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서재필에 대해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서재필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분의 생애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외가 쪽이 꽤 번창했던 것 같습니다.
 
친가는 지금의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였습니다.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7살이 될 때까지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이곳 논산에서 보냅니다.
서재필 박사는 자서전에서 이곳을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고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1

서재필 박사 본가지라는 이정표를 보고 마을로 들어섰으나 갈림길이 나타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금곡1리 마을회관 옥상에서 국기를 매달고 계시는 분이 있어서 길을 여쭈었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2
 
왼쪽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우회전하여 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3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익어가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펼쳐져 어린 시절 고향이 생각났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4
 
골목의 막바지에 차를 한 대 세울 공간이 있었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5
 
그런데, 서재필 박사 본가지라는 안내판과 대나무로 둘러싸인 좁은 공터, 주춧돌 몇 개만 놓여 있군요.

서재필 박사 본가지의 옛 모습 / 출처 - 놀뫼신문
▲ 서재필 박사 본가지의 옛 모습 / 출처 - 놀뫼신문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변형이 이루어져 2018년 서재필 박사 정비 사업을 하면서 원형을 보존하고자 주초석 정비만 한 상태라고 합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6

서재필 박사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어린 시절이 좀 복잡하군요.

외가인 보성에서 태어나, 친가인 논산에서 7살까지 지내다가, 5촌 당숙인 서광하에게 입양되었고, 7살 때 서울로 올라가 양외숙인 김성근의 집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188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절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최초의 근대적 정치 변혁인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을 합니다.
 
일본 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1884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제2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학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미국의 암스트롱 양과 결혼하여 미국 시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독립문의 옛모습 / 출처 - 나무위키
▲ 독립문의 옛모습 / 출처 - 나무위키
 
1895년 조국의 개화 독립에 봉사하기 위하여 귀국한 후 독립신문의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합니다. 1898년 3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독립사상과 민권 운동에 노력하였으나 수구파 정부는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합니다.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 / 출처 - 나무위키
▲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 왼쪽 두 번째  / 출처 - 나무위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자기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팔아서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넣고 1926년에는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합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시 귀국하여 미군정청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병석에서 조국의 불운한 명운을 통탄하다 1951년 86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1977년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서재필 박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7
 
이제 다시 서재필 박사의 본가지로 돌아옵니다.
서재필 박사 본가지는 동네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마을의 민가들이, 뒤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8

본가지 안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안채가 있었습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9

오른쪽으로는 정면과 측면 각각 2칸의 창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논산에서어린시절을보낸서재필박사를집중조명한다 10
 
지금은 비록 주춧돌만 놓여 있지만, 조속히 복원이 완료되어 서재필 박사의 높은 뜻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재필박사 본가지>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
논산시 지정 향토유적 제36호

 

대로님의 다른 기사 보기

[대로님의 SNS]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22775540405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