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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600년 노송이 전해주는 부여군 임천 이야기

일제는 왜 임천 관아 정문을 뜯어 부소산 사자루를 지었나?

2022.05.26(목) 13:28:16 | 자유새 (이메일주소:noblesse0550@hanmail.net
               	noblesse055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복원된 임천 관아터 전경
▲ 복원된 임천 관아터 전경

조선왕조 시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부여군은 존재하지 않았다.사비 백제의 멸망 이후 부여군이 형성된 것은 1914년 일제가 대대적인 군면폐합(1913년 12월 조선총독부령 11호)을 단행하면서부터다.
개화·한말 시기에는 임천군(21개 면), 부여군(10개 면), 홍산군(9개 면), 석성군(10개 면)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중 임천군은 가장 많은 면을 가진 군세를 자랑해 전체 부여지역의 면 가운데 42.0%나 차지했다.
임천 지역의 상업도 이와 걸맞게 금강을 중심으로 하안 포구가 발달한 강경 시장과 함께 임천장이 발달하여 부여 최고의 시장이었다.
임천장은 조선시대 중종 11년(1516)에 충청도의 장시 개설이 허락된 이후로 임천장, 한산장, 서천장, 금강 건너 전라도의 함열장과 함께 하나의 큰 상권을 형성하며 발달했다.
임천 지역 인근 강과 바다에서 잡힌 수산물과 모시, 담배, 지황 등 농산물이 임천장에서 유통되었고, 보부상들은 수로를 통해 금강 하구 서해안 일대까지 이를 유통했다. 지금은 한산모시가 유명하지만, 당시 임천모시하면 팔도 최고의 상품이었다.


옛 고문서에 나타난 임천 관아 지도
▲ 옛 고문서에 나타난 임천 관아 지도

행정기관도 규모가 컸다. 당시 임천 관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문헌에만 그 기록이 남아 있었다. 
부여군은 2009년 임천 관아지 시굴 조사를 시작으로 10억 원의 예산을 마련하여 2019~2020년 2년에 걸쳐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254에 존재했던 임천 옛 관아를 발굴 정비했다.
옛 기록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임천관아 객사는 벽대청을 포함하여 28칸, 동헌은 10칸, 서헌 6칸, 중문 3칸, 외대문 6칸이며, 내아는 15칸, 행랑 5칸, 봉전헌 6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중문은 행랑 11칸과 대문 1칸, 내외삼문대문 1칸, 향청으로 향사당 5칸, 외문은 강산루 6칸 중문인 대문 3칸, 공고(空庫)는 9칸, 작청은 10칸, 군관청 5칸, 군기청 5칸, 관청 9칸, 공수청 10칸, 정과 당으로 만설정 6칸, 보민당 10칸이 있다고 전해지니 그 규모가 자못 작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1919년에 철거되어 부소산 사자루의 재목으로 쓰여진 임천 관아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로 그 아름다움이 컸다고 전해진다. 임천 동헌은 해체되어 대조사의 원통보전으로 옮겨 세워졌고, 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던 형방 건물도 해체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왜 임천 관아는 갈기갈기 찢겨 흩어진 것일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중 한명인 김창수 부여군수...임천 관아 정문 뜯어 사비루 지어
기미년 3.1만세운동 발원지에 저지른 민족의 역사 유적 훼손 사건
 
『산정에 쉬고 구경할 루가 없는 것을 한해온 지 오래더니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동지들과 상의하니 고적보존회 간사 倉剛明日과 헌병분대장 澤田穰二 군이 협심하고, 군참사 종익, 김현갑 2군이 천여금을 먼저 내고 김용배 군이 또 4백금을 내어 고적보존회에 부쳐서 유람선 두 척을 만들고 이어서 1루를 부소산정에 세웠다. 재목이 모자라서 구 임천군의 오누를 뜯어 사용하였다....중략』- 대정8년 己未(1919년) 仲夏(이른 여름) 부여군수 김창수


위 글은 기미년 초여름 임천 관아터를 뜯어 사비루(부소산정)을 지었다는 당시 김창수 부여군수의 글이다. 대정 8년이면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다.
당시 부여군수였던 김창수는 풍류를 즐길 유람선 2척과 누각을 짓기 위해 소중한 민족의 역사 유산인 임천 관아 정문인 배산루를 뜯어냈다. 그의 문화유산 훼손에는 일본인들의 고적보존회와 헌병분대장이 나섰다.
김창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친일 매국노다. 그는 을사늑약의 5적 이완용과 친분이 두터운 자였다.


왜 김창수는 하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 그것도 부여지역 3.1운동의 문을 연 임천에 있던 관아의 상징물인 정문을 뜯어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옮겨지었을까?


부여지역 3.1만세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이른 시기에 발생했다. 부여에는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나돌았고, 독립만세 시위는 3월 6일 임천 구교리에서 본격화됐다. 3월 6일 오전 10시 구교리에서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보통학교 앞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일부는 부여 헌병분대 임천출장소에 몰려가 “한국은 이미 독립하였으며 서울에서 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부르겠다”고 통고했다.
만세 군중은 “우리 땅은 비워 주고,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시위를 벌여 이중 8명이 체포되었다.
임천 만세운동의 파급효과는 컸다. 다음 날인 3월 7일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백마강변에 모였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로 시위 행진하다가 일제 헌병과 충돌하여 천도교 구장 김태현(金泰鉉)이 체포되기도 했다. 시위대열은 둘로 갈리어 하나는 고란사로 향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하나는 기독교도들로서 규암리로 건너가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홍산에서는 면민들이 각처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시위를 외쳤다.                                [자료출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yamu1023/222184454497 ]

이처럼 김창수 부여군수의 임천 관아 정문 훼손 사건은 임천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였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인 2019년. 부여군에서 임천 관아터에 대한 복원을 시작해 그 일부를 복원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우리의 얼을 찾기 시작했다.
 
형방터 앞에 있는 600년 된 노송
▲ 형방터 앞에 있는 600년 된 노송

임천 관아터에는 600년의 세월을 이겨낸 노송이 지금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천장의 왁작지껄한 백성들의 고된 삶도,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3.1운동의 함성도, 관아 정문인 배산루를 뜯기는 아픔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노송. 노송을 쓰다듬으며, 우리는 가림성 사랑나무와 함께 앞으로 다가 올 임천 부활의 꿈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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