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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무령왕릉서 中·日 유물도 출토

무령왕릉 발굴50주년 특별기고

2021.07.15(목) 18:34:54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무령왕 한중일 교류·소통
무령왕릉 통해 백제시대 엿봐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경, 1500년 동안 굳게 닫혀있던 무령왕릉의 문이 열렸다. 왕릉의 입구를 막고 있던 벽돌을 들어내는 순간 흰색의 연기 같은 것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라는 뜻이다.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간 조사단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새겨 놓은 지석이 무덤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수 천기의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을 알게된 순간이다.

지석을 뒤로 하고 좀 더 왕릉 안으로 들어간 조사단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백제왕의 무덤임에도 그 안에는 백제에서 만든 것 이외에 중국에서 보내온 유물, 그리고 일본에서 보내온 유물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머리 근처에서 있었된 금제 관식(冠飾)이 백제왕을 상징하는 유물이라면 자기로 만든 술병과 술잔은 중국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거기에 왕과 왕비의 목관은 일본에서만 자란다는 금송(金松)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한중일 세 나라의 유물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이렇게 무령왕릉에는 백제를 중심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자유롭게 교류하고 소통하던 무령왕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령왕릉을 비롯한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이러한 소통과 교류도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소통하지 않으면 상대를 잘 모르게 되고, 잘 모르게 되면 오해가 싹트기 마련인 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와 상대에 대한 무지는 필연코 불행한 결과를 낳는 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한중일 세 나라도 그랬다. 백제가 있을 때에는 백제를 매개로 소통하고 교류했지만 백제가 사라지자 세 나라의 만남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백촌강전투, 임진왜란, 그리고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이제라도 한중일 세 나라가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열어가려면 우리는 그 방법을 우리 보다 먼저 실천한 무령왕과 백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1500년 만에 열린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무령왕릉서유물도출토 1





 무령왕릉서유물도출토 2


무령왕릉 주요유물 살펴보기
②진묘수


뿔과 날개 달린 상상의 동물

중국 남조 진묘수 영향
 
    
1971년 7월,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발굴단원들이 어두운 무덤 안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1446년 동안무령왕릉을 지킨 진묘수(鎭墓獸)였다.

진묘수는 중국 후한대부터 나타나는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로,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주로 돌과 흙, 나무로 만들었는데, 물소나 돼지 등 다양한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는 머리에 뿔이 있고 몸에 날개가 달려 있으며, 입과 몸통 일부는 벽사의 의미로 붉게 칠해져 있다. 크기는 높이 32.2cm, 길이 48.6cm, 너비 24.0cm이며, 무게는 48.5kg이다. 분석 결과 몸통은 각섬석암, 뿔은 철로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진묘수는 중국 후한시기(25년~220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묘수가 외부 침입자로부터 죽은 이를 보호하고,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중국 서북부 간쑤성, 산시성에서는 뿔이 하나 달린 진묘수를, 서남부 충칭[重慶], 쓰촨성[四川省]에서는 혀를 내민 진묘수를 만들어 무덤에 부장하였는데, 이후 두 유형의 진묘수가 점차 동쪽으로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진묘수의 모습이 변형되거나 합쳐져 새로운 유형의 진묘수로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무령왕릉의 것이 유일하다.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는 네 다리로 걷는 듯한 모습의 뿔이 하나인 진묘수로, 후한대 중국 서북부에서 출현한 뿔이 하나 있는 진묘수 계보를 잇는 남조 진묘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몸통과 다른 재질로 뿔을 만들고 가지 형태로 뿔을 표현한 점, 등에 타원형의 갈기를 새기고 표면을 채색한 점 등은 중국과는 다른 무령왕릉 진묘수의 특징이다.
/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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