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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다시 찾은 예산 추사고택과 백송공원의 봄 풍경

추사 김정희 선생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

2021.04.22(목) 07:59:23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작년 여름 이곳에 왔을 때는 소나무 숲 사이 보랏빛 맥문동이 너무도 고와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옛 선인이 살던 고택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봄의 추사고택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다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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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날씨는 합격점이었습니다. 그리 심하던 황사는 잠시 물러가고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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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이며 할머니는 화순옹주였으니, 왕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이며,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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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정희 선생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추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념관 앞 커다란 붓 모양의 의자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는 소년이 어린 시절의 김정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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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는 김정희 선생이 살아온 길과 그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김정희 선생은 24세에 생원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습니다. 그리고 31세에 북한산 순수비를 찾아가 비문을 낱낱이 조사합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을 얻어 예조참의에 이르지만 45세에 옥사에 연루되어 부친 김노경과 함께 유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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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복권되어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에 이르지만 55세가 되던 1840년에 다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됩니다. 추사 김정희에게는 제주도 유배가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배 8년간 세한도 등 뛰어난 문인화를 남깁니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지만 66세에 또다시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과천에 은거해 후학을 지도하면서 불교에 심취한 가운데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서거합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는 원래 과천에 안장되어 있던 것을 1937년 고택이 있었던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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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의 고택에는 출입문이 두 개 있습니다. 정문과 우물 옆의 협문이 있습니다. 
협문을 통해 고택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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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안채에 들어가려면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안채는 트인 곳 없이 완벽한 ‘口’자 집입니다. 
추사고택은 김정희 선생의 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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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앞에는 목련이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정희 선생이 쓴 석년(石年)이 새겨진 해시계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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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에서 600m쯤 떨어진 곳에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을 볼 수 있습니다. 백송은 중국 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 없는 희귀한 품종의 소나무입니다. 이 백송은 예산 용궁리백송이라고 불리는데 추사 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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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밑동에서 세 줄기로 자라다가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한 줄기만 남아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고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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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과 용궁리 백송나무 사이에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을 기리는 조각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고 어린 백송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백송은 어렸을 때는 줄기가 밝은 회색을 띠지만 자라면서 점차 흰 빛이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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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균 조각가의 '역경 속에 난을 쓰다'라는 작품입니다. 추사는 난을 그리지 않고 쓴다고 했다 합니다. 나그네 같은 삶과 관조하는 모습을 조각했다고 해요.
주변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여 운치를 더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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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김정희 선생의 할머니인 화순옹주홍문을 살펴봅니다. 
화순옹주는 영조 임금의 딸로서 영의정이었던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합니다. 김한신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글씨를 잘 써서 영조 임금의 눈에 들었다고 합니다. 김한신은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로 봉해졌는데 안타깝게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화순옹주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고 해요. 영조 임금은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려 화순옹주홍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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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뒤에는 화순옹주와 남편 김한신의 합장묘를 관리하는 묘막터가 있으며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불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담장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합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며 실학자, 정치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추사고택의 봄이 무르익어 갑니다. 추사고택 주변에는 김정희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할머니인 화순옹주홍문, 천연기념물 백송, 추사 선생이 불교에 심취하게 만든 화암사 요사채 등이 근방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명문 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권세를 누리고, 학문과 서예의 대가로 비치는 추사 김정희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차례의 유배 생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높은 경지의 예술을 만들어 낸 김정희 선생의 고고한 선비 정신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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