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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역사 인물길엔 결성향교가 있었네

내포지역의 서해 바다 쪽 입구에 해당했던 결성

2020.04.13(월) 12:25:05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hjn@hjn24.com
               	hjn@hjn24.com)

내포역사인물길엔결성향교가있었네 1


 

“물이 어디까지 들어왔냐면 여 결성읍에서 관청으로 나가면 다리, 교량. 바닷물이 거기까지 들어왔었다고, 우리들은 하청다리라고 이야기 했지. 그 때는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게도 잡고 해서 먹고 살았지. 잡아서 팔기도 하고. 지금은 바다가 막혀서 어렵지만 여기서 4~5km 떨어진 곳까지 가서 고기를 잡아오곤 했었어. 옛날 말로 충선대 조기 잡으러 다닌다고 하면서 말이야”

이곳의 예전 모습을 물어보자마자 어르신들이 꺼내놓는 이야기에는 짭짤한 소금기가 가득했다.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다른 바닷가 동네였던 결성면은 그 옛날, 백제시대 때는 결기군의 치소(행정중심지)로서 서해안의 군사중심지이기도 하였고 그 이후 줄곧 서해안의 교통, 문화행정의 중심에 있었던 고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70~80대 고령의 노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고장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옛날에 여기는 결성현이었어. 백제시대 때에는 ‘결규부은’이었지. 결규부은의 결은 ‘맺을 결’자이고 규는 ‘몸 규’자를 썼는데 주변의 보령지역이나 홍주지역을 ‘결구은 상하’라고 불렀지. 그러니깐 홍주지역이 여기보다도 작은 현이었다는 거야. 지금의 홍성이란 이름도 1914년에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해질 때 홍주군의 홍과 결성군의 성을 따라 그렇게 된 것이지. 그러니께 우리지역은 비교적 역사가 깊은 곳이란 말이여” 현재의 충남 홍성의 서남쪽 지역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내포지역의 서해 바다 쪽 입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홍성군 홍주목과는 별도의 현감이 수장으로 있을 만큼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예전에 안 좋은 일이 하나 있었다고 해. 1733년에 시부사건이라고. 사연인즉슨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데, 이 일 때문에 결성현이 폐현이 되었어. 그러고선 보령현에다가 붙여가지고 한 3~4년간은 결성이라는 고을이 행실을 못했지. 왜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옛날 거지들은 음식을 얻어서는 모았다가 같이 먹는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이 부자도 이렇게 했겠지. 근데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이 오기 전 음식을 혼자 먹었다 해서 죽였다는 거야.


또 다른 하나는 이 부자가 짚신장사를 했었는데 아버지 짚신만 잘 팔리고 아들꺼는 잘 안 팔려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런 설이 있지. 나라에서는 이런 고을이니께 폐현시킨거지. 부끄러운 일이지 큰 고을이 없어 졌으니 아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여. 그 후 1736에 복원이 된 거야. 다시 결성현으로 살아난 거지. 지방관들이 임금에게로 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사정했거든.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당시 이 사건은 굉장히 큰 사건이었거든. 이 사건을 저지를 사람 이름이 ‘차귀섭’이라고 기록에도 남아있는데 그 사람 이름으로 썼던 한자 ‘차’자가 현재 성씨 열람에는 없어. 그만큼 대단했던 사건이었지” 3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가야지만 알 수 있는 이런 옛 이야기를 그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새삼 입에서 입으로,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이 바로 이런 곳에 숨어있지 않을까 싶다. 내포 역사인물길은 현재의 결성면 읍내리 중심가에 위치한 석당산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처 : 홍주일보(http://www.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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