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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윤봉길의사 생가를 다녀오다

2019.11.22(금) 15:12:56 | 조주부 (이메일주소:imjo_@naver.com
               	imjo_@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봉길 의사 생가(광현당, 저한당)를 영상에 담아보았습니다.
 

윤봉길[尹奉吉]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봉길로
상하이[上海]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봉길 [尹奉吉] (두산백과)


광현당[光顯堂]

매헌 윤봉길 의사가 1908년 6월 21일,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까지 살던 집이다.
의사의 본명은 우의이고, 봉길은 별명이며, 아호는 매헌으로
고려조의 명장 문숙공 윤관 장군의 후예이다.

이곳은 사방으로 냇물이 둘려 있으므로 의사께서 후일
도중도(한반도 가운데 섬이란 뜻)라 이름하고,
왜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하여 이곳에서
온갖 시름을 달래며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하면서
정신수양을 하던 곳이다.

이 집의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의사의
증조부 윤자 때부터 거처했다 하며,
1974년에 정부에서 중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현당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외)


저한당[狙韓堂]

윤봉길 의사가 4살 때부터 중국으로 망명했던
1930년 이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저한당'이라는 이름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적 제229호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에 속해 있으며
이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서 4살 때까지 살았던 광현당(光顯堂)도 함께 있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시대였던 1932년 4월29일
일왕의 생일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킨 독립운동가이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을 복원하였고
유물전시관과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을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저한당 [狙韓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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