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사지제일 김국광을 모신 재실 모원재

2019.07.30(화) 16:21:53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였다는 의미는 어느 한 분야에 치중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 깊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일을 다 알고 그 순위가 첫 번째로 꼽을 만하다는 극찬을 받았던 인물을 모신 사당이 계룡시에 있는데 이름하여 모원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모원재는 보수 중으로, 인조 원년(1623년)에 지은 모원재는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1

계룡에는 김장생이 있듯 광산 김씨의 후손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모원재는 조선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김국광(金國光, 1415∼1480) 선생의 재실(齋室)입니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2  
모원재 뒤에는 잘 정비되고 풍수지리상으로 좋아 보이는 묘소들이 있습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관리로서의 재간과 능력)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던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3
 
집안이 좋다는 것은 높은 벼슬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재능과 식견이 높아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4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5
 
이제 보수 중인 모원재의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모원재는 올해 11월까지 철거공사와 모원재 동재 보수 및 복원을 통해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 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6  
이시애의 난은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해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북도인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7  
약간의 보수 차원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모두 바꿀 정도로 대공사가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공사 기간만 1년이 넘게 걸리고 있습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8   
가난에도 품격이 있다고 합니다.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깁니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고 합니다. 그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간다고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품격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9
 
사지제일김국광을모신재실모원재 10  
김국광은 정유년(1477년, 성종 8)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1478년, 성종9)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습니다. 같은 해 사망하니 나이 66세였습니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입니다.
 

맛난음식님의 다른 기사 보기

[맛난음식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