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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대한민국을 만든 충남의 석오 이동녕

국회의 뿌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2019.05.05(일) 23:04:57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도는 지난 3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유공자 및 유가족 초청 만남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및 유가족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날 양승조 지사는 “기꺼운 희생과 헌신이 이끈 독립운동은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든 원천이자 토대”라며 “선열들의 독립운동은 민족의 자존을 세우는 일이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진실한 외침이었다”고 말하고, “제대로 된 보훈은 나라를 위한 모든 희생을 끝까지 찾아내고 기억하며, 합당하게 보답하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충남도가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다하기 위해 더 다양한 시책을 발굴하고 추진해 나아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와 같은 맥락의 행사가 있었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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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 하나 던져 봅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충청의 자랑인 석오 이동녕 선생이 만든 나라 이름으로 '한국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인데, 국회도서관 지하 강당에서 5월 1일 오후 3시에 열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주최 충청남도 주관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정수립 100주년 기념 '석오 이동녕 선생에게 길을 묻다' 토크 콘서트에서 알게된 사실입니다.

해방 후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동녕(李東寧) 선생은 영해군수를 지낸 전통 명문가인 연안(延安) 이씨 가문의 이병옥을 아버지로 하고, 광주 안씨 집안 출신의 모친을 어머니로 하여 186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석오(石吾, 石五, 石梧) 또는 암산(巖山), 자는 봉소(鳳所), 이명으로 이량(李亮)이 있고,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는데 10세 때부터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조부 이석구(李錫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였다고 합니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 광성학교를 세운 아버지의 육영사업을 도와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개화 민권의 기수로 구국 운동을 전개하다 1918년 상해로 건너갔습니다. 상해에서 정부 조직을 강구하다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하였으며, 4월 11일 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전장[鎭江]에서 요양 중 상해로 와서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습니다. 이때 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한 바 있었습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 의장[11대]이 되었고,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가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어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존폐의 위기에 선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두 번째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930∼1932]이 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 선생과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는 등 일흔 노구로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과 광복군 창설에 노심초사하다 1940년 3월 13일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쓰촨성[四川省] 치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단결하라'는 유언에 따라 그 해 5월 세 정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하게 되니 이는 모두 모든 열정을 조국 광복과 단결에 바친 선생의 공적이라 하겠으며 전체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습니다.

조국 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이동녕 선생의 봉환식을 거행하고 효창원[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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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대한민국임정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석오 이동녕 선생에게 길을 묻다' 토크 콘서트는 양승조 충남도지사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는데, "이번 행사는 조국을 빛낸 독립운동가의 삶을 국민들께 보다 가까이 전하기 위하여 기존의 학술세미나 형식을 탈피하여 토크 콘서트로 준비되었습니다.우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충남을 빛낸 독립운동가’를 통해 체계적으로 재조명된 이동녕 선생님의 삶과 임시의정원의 활동이 새로운 100년을 위한 우리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님은 충남 천안 출신의 제1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또한 이상설 선생 등과 함께 ‘서전의숙’을 설립하는 등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셨습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이동녕선생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진전되고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향한 국민의 열정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길 바랍니다."라며 “이동녕 선생은 20여 년 동안 통합 임시정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강건히 이끄셨다”고 이동녕 선생의 업적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선생의 삶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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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날 토크 콘서트에는 충남 천안지역 국회의원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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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정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석오 이동녕 선생에게 길을 묻다' 토크 콘서트의 식전 행사에서 훌륭한 연주와 무대 장악력을 보여 준 가야랑은 미국, 중국,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두바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터키, 이탈리아 등 해외 초청 공연을 통해 글로벌적인 명성을 얻은 국악 연주자 겸 가수입니다. 이들은 우리소리 전파에 앞장서며 가야금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유일의 쌍둥이 가야금 듀오인 이들은 최연소 대통령상 수상자이자 전설의 가야금 연주자 옥계 변영숙 선생의 딸들이라고 합니다. 모태 가야금 연주가인 이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수자이자 젊은 가야금 명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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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겹고 감동적인 식전 공연이 끝난 후 300명 가까이 참석한 사람들은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토크 콘서트가 진행되었는데 충남역사문화원구원 이종수원장은 개회사에서 "그 동안 독립운동의 큰 인물 이동녕 선생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저조해 그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이 토크콘서트를 개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앞으로 이동녕 선생의 독립운동과 독립정신에 대해 더 알려나가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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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입원 중인 문희상 국회의장을 대신해 참석한 박수현 비서실장은 인사말을 통해, "충남 출신 전 의원으로서 충남의 자랑인 석오 이동녕 선생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중심적 역활을 기리는 이런 행사가 국회에서 열려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앞으로 더 큰 어른으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공자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올바른 대접을 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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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도 참석해 인사말에서 충남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이자 뿌리라며 오늘날의 국회의 맥을 잇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할 필요를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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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최원정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된 토크 콘서트는 좌로부터 박경목(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KBS 최원정 아나운서, 한시준(단국대학교 교수), 김희곤(안동대 교수,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이 함께 했는데 주제 발표와 아울러 최원정 아나운서의 격의 없고 매끄러운 진행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중 계룡도령에게 가장 와 닿은 이야기 중 하나가 이글의 서두에 던진 질문에 관한 것으로 '대한민국'이란 국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은 '대한'이랍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이기 때문에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이를 줄인 것이 '한국'이며, 역사 속 삼한을 뿌리로 아우르는 이름인 '대한제국'은 '황제의 나라 대한'이라는 의미지만 역시 줄여 부를 때엔 '한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가는 분위기로 이어지며 흥미로운 내용들이 오갔는데, 요약하면 우리가 맞이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정수립 100주년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지만 과연 그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해 모두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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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콘서트는 이제 청중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어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유관순 열사의 경우처럼 저평가된 서훈 문제가 석오 이동녕 선생에게도 남아 있다며 그에 대한 안타까움의 피력이 많았습니다.

천안 한마음고등학교 구자명 교장선생님, 그리고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혁범 부회장 등의 의견 제시 후 질문이 이어졌는데, 독립유공자들을 모시는 추모제 등이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주도해 치러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좌중의 청중들은 모두 황당해 하고 참담해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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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제안이나 질문 중에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국회의 로텐다홀에 있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석오 이동녕 선생의 흉상을 동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지 옳지 않는가 하는 지적과, 삼권분립이 확실하게 되어 있던 임시정부 헌법인데도 이동녕 선생의 흉상 소개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선생 상'이라 표기되어 있어 자칫 3권 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치 임시정부 산하에 의정원이 속한 듯 오해를 할 수 있는 표기이니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국회의장 비서실장인 박수현 전 의원에게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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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5월 4일[토]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문희상 국회의장 박수현 비서실장으로부터 사진이 도착했는데 잘못 표기된 부분은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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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잘못 표기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석오 이동녕 선생의 출생일은 9일에서 6일로 수정되었습니다. 끝으로 단국대 한시준 교수의 발제 중 일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충청남도의 관계" 부분을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또 중국에서 26년여 동안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민족 구성원 대다수의 헌신과 공헌이 있었다. 3·1독립선언과 이를 이은 독립만세시위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계기와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26년여 동안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의 국민들을 비롯하여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 있던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족구성원 대다수의 헌신과 공헌 가운데, 충남인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또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었던 데 충남인들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3·1독립선언이었다.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한용운(韓龍雲)이 있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 출신이다. 또 독립선언에 서명자 중 한 사람이자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하였던 이종일(李鍾一)은 태안 출신이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이후,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독립만세시위운동은 국내의 전국 각지를 비롯하여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서도 전개되었다.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수많은 만세시위운동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고 널리 알려진 것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는 충남 천안의 목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이고, 그것을 주도한 유관순은 만세시위운동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유관순은 충남 천안 출신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에도 충남인이 크게 역할하였다. 홍성 출신의 김좌진(金佐鎭)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1일 길림에서 국내외 인사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것으로, 2·8독립선언서 및 3·1독립선언서와 더불어 3대 독립선언서로 평가받고 있다. 김좌진은 조소앙(趙素昻) 등과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대한독립의군부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기여한 것도 충남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수립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은 천안 출신인 이동녕(李東寧)이었다. 이동녕은 의장으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주도하였다. 그의 주도하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정부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되살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도 충남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중반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문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사들이 떠났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활동은 극히 침체되었다. 이를 벗어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상해 홍구공원의거였고, 그것을 실행한 인물이 예산 출신인 윤봉길(尹奉吉) 의사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해전승축하식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결행하였다. 단상에 있던 주중공사 시께미쓰·육군중장 우에다·해군중장 노무라 등은 큰 부상을 입었고, 상해거류민단장인 가와바다와 육군대장 시라까와는 죽었다. 시라까와는 육군대신을 지낸 일본육군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고, 상해파견군 사령관으로 상해침공을 총지휘하였던 인물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의 3대 쾌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일본군의 수뇌를 처단한 의거이기도 했다. 일제는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침공했다. 중국국민당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30만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였다. 중국군 30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낸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한국 못지않게 중국이 통쾌하게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거의 지원한 일이 없었다. 장개석은 이를 주도한 김구를 불러 면담하였고,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들을 양성하도록 하였고, 재정적으로도 지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던 동포들도 감동하여, 독립금·혈성금 등의 명목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정부의 지원과 미주동포들의 후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활기를 찾게 되었다. 떠났던 인사들이 다시 참여해 오면서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고, 재정적 지원과 후원으로 활동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고,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었다. 꺼져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불길을 붙인 것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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