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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논산 명재 윤증 고택의 봄과 사람이야기

2019.04.29(월) 18:55:06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명재 윤증은 본연의 격을 갖추기 위해 독서를 통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받고, 매사에 독서한 내용을 상기하고 때에 맞게 실천해야 깨닫는 것이 있으며, 나날이 깨닫는 것이 쌓이면 자연스레 이치를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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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때 비로소 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무리를 이루게 되며,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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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당대 대학자였던 우암 송시열의 반대편에 서서 서인 소장파 소론을 이끌었던 윤증은 1663년(현종 4)에 천거되어 내시교관, 공조랑, 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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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대에도 호조 참의, 대사헌,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지만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상소를 통해 소견을 피력하면서 지식인이자 유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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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탈출하고 어머니는 자결했던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아들인 윤증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가정사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윤선거는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관직에 오르지 않고 평생 고향에 은둔해 학문을 닦았는데, 아들 윤증 역시 그 통한의 아픔을 새기면서 일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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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은 아버지와 스승인 송시열 사이에서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선거의 사후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고 비난한 윤휴가 제문을 보냈는데, 덕을 추구했던 윤증은 사양하지 않고 받게 된 것이죠. 이에 송시열은 크게 노하게 됩니다. “윤휴와 허목 등은 본시 사류이므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내치지 말고 차차 등용해 쓰는 것이 인심을 얻는 일이다.”라는 아버지 윤선거의 의견을 사후에 편지로 보낸 것이 더 격분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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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을 대표하는 유학자 윤증과 대전 회덕을 대표하던 유학자 송시열은 이렇게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윤증은 “부친이 죽어야 될 의리는 처음부터 없었고, 부친이 살아남게 된 것은 천명”라고 말하며 사제 간의 의리를 끊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회니시비(懷尼是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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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은 군자가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 도리를 지켰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경의를 가지고 남을 섬기며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진정한 바를 묻고, 분노를 터뜨릴 때는 그 해악을 생각하여 행동했지만 결국 스승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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