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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보령의 중심지였던 보령관아문의 역사

2018.12.17(월) 11:50:13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것은 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동헌(東軒)이고 현감의 살림채인 내아(內衙)가 있습니다. 보령 관아문처럼 지방관아에서는 누문으로 된 아문으로 위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보령성곽이 있는 곳의 내삼문은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보령 관아문처럼 관아의 아문 은 누문으로서 일층은 대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고, 이층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에 창호를 달지 않아 주위를 쉽게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보령의중심지였던보령관아문의역사 1

축성 당시의 규모는 둘레 630여 m, 높이 3.5m였으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m와 북쪽 성벽 약 360m만이 남겨져 있는 상태입니다. 

보령의중심지였던보령관아문의역사 2


네모반듯하게 쌓여 있는 보령성곽의 흔적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정면에 보이는 누각의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령의중심지였던보령관아문의역사 3


1432년에 제민당ㆍ공아 ㆍ병기고 등 140여 칸 규모의 건물을 지으면서 지역 거점 방어소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보령의 시골 풍경을 간직한 곳이지만 보령의 중심지였던 옛 모습이 어떠했을지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보령의중심지였던보령관아문의역사 4


관아라고 하면 지금의 시청이나 도청을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지방에서는 경기도·충청도 등 팔도와 그 밑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고 도의 관찰사(또는 監司)가 소관 마을을 관할하는 부윤·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을 통괄하면서 지방자치를 주도하였습니다. 

보령의중심지였던보령관아문의역사 5


보령성곽 안쪽으로는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령의 북쪽으로 가다 보면 관심 있게 지켜보면 보령 성곽으로 가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역사적인 흔적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 산성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성곽과 들어가는 입구를 의미하는 관아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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