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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금산의 분위기 좋은 소박한 수심대

2018.11.21(수) 15:35:53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중봉 조헌이 우거 하던 곳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에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는 곳에 수심대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금산에서도 안쪽으로 들어가야 만나볼 수 있는 수심대는 계절에 상관없이 독특한 풍광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1

수심대가 있는 곳은 생각보다 좋은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심대'라는 이름은 조헌이 지은 것이며,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2

금산 하면 생각나는 것이 농바우 끄시기입니다.  ‘농바우’라는 명칭은 시루봉 중턱에 있는 받닫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농바우 끄시기’는 ‘농(籠) 바위 끌기’라는 뜻의 방언입니다. 수심대가 있는 곳은 농바우 끄시기 놀이가 있었던 어재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곳에서도 비슷한 놀이가 있지 않았을까요.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3

대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유학자이며 송촌동의 동춘당공원을 있게 한 사람인 송시열과 이곳과 연관이 있습니다. 조헌이 붙인 이름을 글씨로 새겼기 때문입니다.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4

송시열은 1689년 숙의 장 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압송되던 길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5

이곳에 이름을 붙인 조헌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이 임진왜란 때 침략을 당하자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 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고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금산의분위기좋은소박한수심대 6

아직 완전한 겨울은 아니니까, 고개를 돌려서 살짝 가을 풍경을 맞아 봅니다.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 살을 먹게 됩니다. 새해가 오면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설렘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같이 옵니다. 금산의 한적한 곳의 소박한 명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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