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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 분들의 칠백의총

2018.08.30(목) 09:02:08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사총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금산성에서 중과부적의 왜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것을 기리며 당시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곳입니다. 대전에서 금산읍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중간쯤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금산 칠백의총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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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칠백의총이 있는 곳 앞에는 칠백의총 종합정비사업 1단계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에 있는데요. 이곳이 완공되면 새로운 모습이자 역사공원으로 금산의 명소로 자리잡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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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인데 어찌 나라가 온천키를 바라겠느냐."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 와서 야스히로가 예조판서의 대접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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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잘 조성된 공원으로 그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려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의주에 피난 조정을 설치하고 명나라의 도움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금산의 이치와 금산성에서는결정적인 적투가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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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에서 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이치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군이 전멸하기 4일 전 금산 이치에서는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북 현감 황진이 이끄는 군이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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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 명의 조선군으로 고바야키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을 저지시키며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것을 저지했지만 4일 뒤 금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모두 전멸하고 그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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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반발하고 나서 선조가 몽진을 하고 빈 한반도를 지킨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이 땅을 지키겠다는 백성들의 의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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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고 나서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에는 순의단이 설치되어 해마다 제향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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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7백 의총이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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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에 모셔지고 있는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 명(明) 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 또다시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 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조헌은 서인(西人)의 입장을 강경하게 유지해 이이와 성혼을 지지하면서 강경한 상소를 많이 올렸던 사랍입니다.  
금산성에서 조선 의병 700여 명을 몰살시킨 왜군은 이순신과 휴정의 마지막 전투후에 모두 물러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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