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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신창현의 명소 역사공원과 척화비

2018.03.17(토) 21:30:56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산의 신창현은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많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 의미를 되살려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척화비도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신창현의명소역사공원과척화비 1

온양군, 아산현과 더불어 아산의 역사적 근간을 이룬 신창현 읍치의 역사적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라고 하는데요 관아의 위치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 고증되었고 본 대상지는 조선시대 신창현 동헌의 인접부지라고 합니다. 

신창현의명소역사공원과척화비 2

신창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건치 연혁이 나오는데요. 본래 백제의 굴직현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으로 고쳐 탕정군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다시 천안부로 이속시켰다고 합니다. 

신창현의명소역사공원과척화비 3

신창현 역사공원에는 공북정이라는 정자 하나가 있습니다. 신창 수령 조군유가 새로 정자를 짓고 공북이라는 편액을 걸었던 공북정은 신창현을 평안하게 했던 상징처럼 여겨지는 정자입니다. 조후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간소하고 요약되게 정치를 하고 번거롭게 명령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는데 정자를 짓지 말라고 해도 즐거이 이곳에 와서 관청과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신창현 척화비는 1866년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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