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백제부흥군 마지막 거점지 임존성

백제부흥군위령제 거행

2017.11.06(월) 12:01:12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백제 부흥의 마지막 거점인 예산군 봉수산 해발 2,4km 임존성 우물지 근처에서 지난 11월 2일에 대백제 부흥군 위령제를 봉행했다. 예산문화원 (원장 김시은)이 주관하고 초헌관 황선봉군수, 아흔관 김시운 문화원장, 종헌관 한규복 문화원 부원장 관계자외 예산군민 약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제 부흥군의 고혼을 위로하는 위령군 살풀이, 위령 제례를 지냈다. 해발 484m 봉수산에 있는 예산 임존성은 백제 멸망(660) 이후 한산 주류성, 유성 내지성, 두류윤성과 함께 백제부흥군의 4대거점중의 하나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1

사적 제90호인 예산 임존성은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 근거지 중 하나로 660년 8월 임존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백제시대 최대산성으로 북쪽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임존성은 백제멸망후에는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후삼국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의 격전지로 역사에 전해진다.
 
백제 부흥군은 처음에는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200여 성을 되찾는 듯 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일어나 결국 백제 명말의 지름길이 되었다. 나당연합군이 이 기회를 얻어 663년 9월에 부흥군의 존거지인 주류성을 함락하여 3년 반에 걸친 백제부흥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존성에서 지수신이 지키고 있던 임존성도 664년에 함락됨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은 종식 되었다. 
임존성은 부흥 운동의 첫 봉화 지인 동시에 거점으로 부흥 운동을 지휘했던 흑치상지와 도침이 주지 스님으로 있었던 대련사가 임존성 가는 길에 아직도 있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2

백제부흥군 위령제를 지낸 후에 지난 1년 동안 예산문화원에서 예산학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에게 예산학 강의 수료식이 있었다.  내포의 뿌리 예산지명 1100주년을 맞는 기념으로 시작한 예산학은 예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소중한 기회였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3
▶임존성에 있는 백제 부흥군 우물지 

지금도 물이 솟아나고 있는 우물지 부근은 임존성 복원 구간으로 잘 다듬은 돌은 청수라고 불렀던 우물이다. 임존성은 세계에서 하나뿐인 수정식 성으로 가장 놓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안에 모아두었다가 적이 공격할 때에 물고를 터뜨려 1차로 곤경에 빠뜨리고 나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고 한다(충남지역의 문화유적 제9집)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4
▶ 우물지 옆에 있는 백제 부흥군 우물지 표지석 

백제는 660년 8월 29일에 의자왕과 그의 아들 태자 부여 효는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잔을 따르는 항복식을 함으로써 백제 사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백제의 좌평을 비롯한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늙은 의자왕이 술잔을 치게 하는 모욕을 안겨준 것은 백제인들을 크게 자극했다.

의자왕이 끝가지 대적하지 않고 항복한 것은 국가생존을 위한 한 방편이었지만, 현실은 무자비한 약탈과 아녀자들의 겁탈을 일삼았다. 항복식을 지켜보던 10여명의 장수들이 밤에 몰래 도망쳐 나와 봉수산 임존성에 올라 백제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백제 부흥의 깃발을 정상에 꽂고 봉화를 올린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5

흑치상지는 덕산 출신으로 치아가 검고 키가 크고 용맹하고 날쌘 장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임존성에 열흘 만에 3만에 이르는 백제 유민들이 모여들었다. 백제부흥운동의 첫 봉화가 임존성에서 올려지게 된 것이다. 임존성에 규합된 3만 명 중에는 일반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무장상태가 취약했으나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제대로 무장할 수가 있었고 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다.

임존성에 백제 부흥의 봉화를 올린 사람들은 흑치상지를 비롯한 의자왕의 조카 복신, 승려 등 백제 장군들이었다. 임존성은 661년 3월까지는 백제 부흥 운동의 거점이었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6

성벽안으로 박힌 묘순이 바위가 옛전설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물지 근처에 복원된 임존성은 약 100m로 옛석축을 허물고 새로 가져온 돌로 쌓아 역사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더러있다. 성을 새로 쌓기 전에는 이곳에 소풍온 학생들이 묘순이 바위위에 올라가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봉수산 아래 까지 와서 느티나무에 배를 메어 놓고 8월 26일에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이 워낙 산세가 가파르고 험해서 당나라 병사들이 올라가기를 주저했고 결국 퇴각하게 된다. 결국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9월 3일에 백제 의자왕 등 신하 88명과 백성 1만 2천여 명을 이끌고 당으로 떠났고, 소정방은 660년 11월 워양에서 당 고종에게 의자왕을 포로로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당군과의 전투에서 백제 임존성 부흥군이 초기에는 승리하여 200여 개의 성을 일거에 회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서 결국 백제는 망하게 되고 그 이야기는 극적으로 흥미진진하다. 이번에 임존성에서 거행한 백제부흥군 위령제는 지역민들에게는 지역의식을 고취하고 백제를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던 백제 유민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소중한 기회였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7
▶ 복원한 100m임존성에서 바라본 원수봉

대흥슬로시티 입구에 사는 전 의원 사모님(93)의 증언에 의하면, 원수봉이라 함은 저 원수봉을 둘러싸고 임존성을 쌓지 않아 적의 침입에 이길수가 없었다고 하는 뜻에서 원수봉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눈앞에 우뚝선 산, 바로 저 원수봉에 나당연합군이 봉우리에 올라 임존성안의 동태를 자세히 파악할수가 있었다. 저 원수봉 때문에 백제부흥군은 3년을 버티다가 663년 11월에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8

복신이 승려도침을 죽이고 풍왕과 대립하다가 처형되고 풍왕이 불러들인 왜의 구원군마저 백강전투에서 대패한다. 풍왕이 고구려로 달아나 부흥군의 거점은 임존성 한개만 남게 되었다.백제부흥군 장수들의 내분으로 백제부흥군의 멸망에 이르자 흑치상지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의 회유책에 넘어가게 된다.유인궤는 사타상여와 흑치상여로 하여금 임존성을 공격하게 하여 한민족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한때는 장군으로 모시던 유인궤가 당나라 장수가 되어 공격해오는 모습을 보고 지수신은 망연자실하여 고구려로 도망치게 된다.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이 무너짐으로써, 결국 백제부흥군은 3년반만에 나당연합군에에 항복을 하게된다.

한편 당나라로 간 흑치상지는 677년 48세에 중국 당나라의 명으로 토번(티베트)과 돌궐을 정벌한후에 공을 인정받아 대총관이 되었고 티베트를 방어하는 현재의 칭하이의 광활한 땅을 다스리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측전무후시대에 조회절의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무고를 입어 옥사했다고 전해진다.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9
 

백제부흥군마지막거점지임존성 10

임존성 남문지를 거쳐 대련사로 내려오는 길에는 1300여년 전에 쌓았던 석축들이 무너져 내린채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게한다. 이끼낀 돌들이 복원한 100m 성보다 훨씬 역사의 신비로운 베일을 스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듯하다.

대련사에 차를 주차시키고 약 15분동안 임존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서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운동삼아 걷기에는 적격이다. 마른 낙엽이 다소 미그러워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지만 등에 흐르는 땀과 백제인의 최후를 생각하고 걷노라면 나름대로 운치있는 산행이 될것이다.

임존성 남문을 돌아 대련사로 내려오는 길에는 1970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전가지만해도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집터가 남아있다. 예당호가 생기기전에 마을에 살았던 주민들이 집터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주위에 오래된 은행나무와 밤나무, 도토리나무가 그 증거다. 이렇게 가파른 언덕위에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산에서 땔감을 해다가 지게에 지고 예산읍내장에 가서 팔아서 생필품을 사다가 살았다고 인근 마을주민이 증언한다.    

 

도희님의 다른 기사 보기

[도희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