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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연재소설] 천명 (47·끝) 탕평책

청효 표윤명 연재소설

2017.06.27(화) 21:33:33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천명47끝탕평책 1


천명47끝탕평책 2

영조는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히 왕권에 도전을 하다니, 그 결말이 어떠한 것인지 이제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영조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웃음을 외암 이간은 보았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던가? 저 웃음에 우리는 걸려들고 말았다. 아! 왕권은 진정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가?’

외암 이간은 어떻게든 왕권으로부터 신권의 몫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도 자신들을 핑계로 한, 정적 호서인들에게서 말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자신들에게까지 미치고 말았다.

“그만 하라! 이제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영조는 큰 소리로 국문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삭탈관직했다. 이어 낙하인들에게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는 모두 낙하인들의 불순한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낙하인들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영조는 낙하인들까지 삭탈관직하는 것은 물론 인물성동이론의 위험성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뜻대로 성호(星湖) 이익과 현묵자(玄默子) 홍만종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을 대거 등용시키고 이들의 독주를 막기 위해 강화학파인 하곡(霞谷) 정제두와 백하(白下) 윤순 등을 불러들였다. 또한 남은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을 고루 기용하는 이른바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다.

무소불위의 왕권(王權)에 신권(臣權)은 늘 기가 죽어 있었다. 그것을 주자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이름으로 되찾으려 했다. 왕권을 대신할 통치주체로서 강력한 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리(理)와 기(氣)가 바로 그것이다. 리(理)는 왕권의 상징이요 기(氣)는 신권의 상징으로서 이 리기(理氣)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인 것이다. 리(理)를 떠난 기(氣)는 있을 수 없고 기(氣) 없는 리(理) 또한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해 세상을 통치해야만 세상이 올바르게 다스려진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왕권만이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권에도 당연히 그만한 통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이 올바르게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 성리학의 요체다.

그리고 이러한 성리학이 조선을 만든 기반이다. 조광조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로도 왕권에 대한 신권의 제 몫 찾기는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왕권을 옹위하는 듯 했으나 속으로는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갈등을 불러 일으켜왔던 것이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은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주자의 뜻에 따라 신권을 되찾겠다는 율곡의 이기호발설과 왕권을 따르겠다는 퇴계의 기발이승일도설이 그것이다. 이들은 결국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섰고 신권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서인들이 권력을 잡게 된다. 이들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고 노론은 인물성동이론을 두고 낙하파와 호서파로 나뉘게 된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수암 권상하와 그의 제자였던 강문팔학사들이 낙하파와 호서파로 나뉘어 논쟁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외암 이간을 필두로 관봉 현상벽, 한천 이재, 여호 박필주 등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보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스승인 수암 권상하를 비롯해 남당 한원진, 병계 윤봉구, 운평 송능상, 매봉 최징후 등은 인성과 물성이 같을 수 없다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인물성동론은 파격적인 사상이었다. 엄연한 신분사회에서 왕과 신하와 백성이 모두 똑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던 인물성동론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매우 충격적인 사상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신분이란 굴레에 억눌려 있던 시대적 상황이 그런 파격적인 생각을 이끌어내게 했던 것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던 민초들의 반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인물성동이론을 널리 알리고자 꾸며낸 이야기다. 이야기속의 학자들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이 분들의 관직이나 이야기는 필자가 꾸며낸 것임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인물성동이론을 주장한 선인들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며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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