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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청양에 하나 뿐인 역사유적 청양 유의각

2017.06.15(목) 19:54:16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느리게 움직일수록 보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
공감하시나요?
 
여행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1
 
청양군 운곡면을 지나 청양군청으로 향하다
우연히 발견한 역사유적 안내 표지판...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에 끌려 찾아 들었습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2
 
고풍스러운 모습의 고각은 충분히 기대를 갖게 합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3
 
길게 이어져 있는 돌계단 저쪽...
솟을대문이 위용 있게 서 있습니다.
 
유의각이 어떤 곳일까요?
알려진 바로는 현재 유일한 유의각이라고 하는데...

유의각은 조정에서 내린 관복 유의를 보관하는 장각을 이야기하며 안내문에는 "조선 인조 때의 무관(武官) 박신용(朴信龍) 장군에게 조정에서 내려 주었다고 전하는 유의(遺衣)를 보관한 곳으로, 1885년(고종 22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장군(1575∼1627)의 호는 택수(澤 ),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황해도 백천(白川) 출신으로 세 살 때부터 이곳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의주(義州)에서 후금(後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에 공훈을 포상하고자 관복(官服)을 하사하였다.
유의각에 봉안된 유의는 단령(團領)·청천익(靑天翼)·홍천익(紅天翼)·전복(戰服) 등 4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새긴 비(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이설(李楔)이 지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이며 주위에 담장을 둘렀고, 출입문은 영조 7년[1731년]에 건립한 충신 정려문으로 3칸의 솟을대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만
안내문에는 영조 7년(1731년)은 신해년(辛亥年)으로,
홍살문에는 영조신미[英祖辛未]라고 적혀 있는 것과 배치되는데,
여기저기 아무리 확인을 해봐도
영조 27년[신미년(辛未年) 1751년]인 것같습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4
 
전 박신용 장군 의대[傳 朴信龍 將軍 衣帶]
조선 인조 5년 [1627년] 정묘호란 때
적과 싸우다 전사한 박신룡 장군이 입었다고 전해지는 복식 4점으로
관복1점, 청천익, 홍천익 각1점과
전복으로 입었던 답호인데
지정 유물은 1885년(고종 22) 박신용 장군의 유의각(遺衣閣)을 세우고
봉안하였던 복식으로
각 유물의 형태가 박신룡의 생존 시기에 성행한 특성을 보이지 않고
그보다 100여 년에서 200여 년 이후인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유의각을 세우고 복식을 봉안할 때 박신룡의 옷을 마련하지 못하고
후손의 옷을 대신 봉안한 것으로 보여
지정 명칭 앞에 ‘전(傳)’자를 붙여 부르고 있지만
1980년 4월 1일 중요민속자료 제110호 지정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래는 안내 표지판에 적힌 소개 글입니다.
 
-관복(官服) 1점 : 목둘레는 깃을 만든 단령(團領)이고, 북청색 모시로 만들어졌으며 흉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청천익(靑天翼) 1점 : 옷감은 푸른색 명주이며, 동정을 한 가지로 만들었다. 천익은 철릭 또는 첩리(帖裡)라고도 하는데 청과 홍 두 종류가 있다. 왕의 행차 수행이나 전쟁 중에 장수들이 입던 옷으로 위는 저고리, 아래는 치마로 되어있다.
-홍천익(紅天翼) 1점 : 청천익과 비슷한 크기이며, 붉은 벽돌색의 명주이다.
-전복(戰服) : 평복 위에 걸쳤던 것으로 옷감은 명주이고, 짙은 보라색으로 되어 있으나 속과 동정은 흰색의 천을 사용하였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5
 
고풍스러운 자물쇠로 채워진 대문 사이로 엿보이는
충청남도 청양 역사유적 가볼 만한 곳
청양유의각[靑陽遺衣閣]의 모습입니다.
 
솟을대문 3개의 문이 모두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돌며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대한민국 유일의 청양 역사유적 청양유의각인데
정작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니 몹시 서운합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6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7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8
 
고종22년(1885)에 유의각(遺衣閣)을 세우고
이 유물들을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1874년 민병승(閔丙承)이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나
1896년 이설(李崔)의 유의각비문(遺衣閣碑文)에 의하면,
당시에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허묘(虛墓)를 만들고
집에 있던 박신룡 장군[朴信龍 將軍]의 유의와 신발을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청양에하나뿐인역사유적청양유의각 9
 
청양유의각에서는 지금도
박신용 장군[朴信龍 將軍]의 충의 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후손들이 관복을 소장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보다 널리 알려져 선조들의 덕행과 충의정신을
함양하는 장소로 사용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지적한 대로
영조 7년[1731년]으로 적혀있는 안내판은
영조 27년[1751년]으로
충분한 검증을 거쳐서 수정하면 좋겠습니다.

역사란 바른 정보로 전해져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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